롤프데겐 지음ㆍ최상안 옮김 / 한길사 발행ㆍ380쪽ㆍ1만6,000원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여주인공 샐리는 손님으로 가득찬 식당에서 여행 동료인 친구인 해리와 논쟁이 붙는다. 대부분의 여성이 섹스 중에 거짓 오르가슴 연기를 하느냐의 여부를 놓고서다. 샐리가 눈을 반쯤 감고 이상야릇한 신음소리를 내자, 그녀의 능청스런 거짓 오르가슴연기를 넋 놓고 바라보던 손님들은 “저 여자 식탁 앞에 놓인 메뉴로 주쇼”라고 주문한다.
오르가슴을 익살스럽게 그리고 있는 이 장면은 공개리에 이야기하기는 꺼리지만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오르가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일의 프리랜서작가 롤프 데겐은 이 같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백과사전처럼 풀이해준다.
성적 극치감을 의미하는 오르가슴이 어떤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주는지, 오르가슴은 신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지, 오르가슴에 대한 남녀의 차이는 어떤지, 진화과정 중 어느 시점에서부터 있어왔는지, 오르가슴이 사회ㆍ종교ㆍ문화와는 어떻게 조응했는지 등을 수십년간 집대성된 진화생물학, 뇌과학, 인류학, 심리학 등의 이론을 통해 답해준다.
오르가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궁금증의 하나는 왜 남녀간에 오르가슴의 시차가 발생하는 지다. 지은이는 그것이 종족번식이라는 진화의 원리와 관련돼있다고 본다. 오르가슴은 여성의 번식장치 안으로 정자를 운반하는 장치인데 남성이 사정이라는 번식을 위한 절차를 완수하기도 전에 여성이 먼저 만족을 얻고 돌아눕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오르가슴의 발생이 쾌락과 관련 있는 것인지 종족번식과 관련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해명을 시도한다.
책은 오르가슴은 ‘유전자 증식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라는 진화론적 입장에 서있다. 가령 원시상태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는 속수무책으로 맹수들이나 적대적인 동족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절정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소요되는 등 평소 음식을 구하거나 그 외의 일에 써야 할 에너지를 성관계에 소모해야 했다.
그러나 오르가슴이 절정에 도달한 그 순간의 행복감은 그 어떤 보상보다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인류 번식을 위해 힘겨운 성관계에 대한 보상책으로 오르가슴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오르가슴, 광의의 의미로는 인간의 성욕과 관련된 프로이트의 이론이 반박당하는 풍경도 흥미롭다.
성기와 무관한 오르가슴이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지은이는 젖먹이가 엄마의 젖을 빨며 오르가슴을 느낄 수도 있다는프로이트의 ‘수유 오르가슴’은 정신분석학자의 망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 오르가슴의 폭발적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이론도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는 최대의 금욕시기 였지만 이 시기의 문화적 업적이 탁월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고 성 문란 현상이 만연했던 계몽주의 시대에 일련의 발견과 창조적 업적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르가슴은 인간이라는 종(種)에게 불멸의 희망을 불어넣어준다”고 썼다. 비록 조물주가 남녀에게 일치된 오르가슴을 주지는 못했지만 과연 그것이 없었다면 인류가 다른 종들을 따돌리고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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