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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등산 실력은 走力 아닌 酒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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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등산 실력은 走力 아닌 酒力?

입력
2008.01.02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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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과 술은 깊은 따름수 관계를 갖고 있다. 산에서 내려와 소주 한잔 하는 것은, 선후배 덕담을 나누며 우의를 쌓는 의미 있는 자리다. 그러나 2차를 가면 많은 기행과 비화를 낳아 뒷날 호사가의 입에 오르게 된다. 지금은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술을 절제하는 편이지만, 옛날에는 술 마시기 위해 산에 가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주력(走力) 아닌 주력(酒力)을 자랑하며 말술을 사양하지 않던 주호(酒豪) 김재근(경희대산악부 O.B). 그는 한국 산꾼 중 최고의 주당이다. 한창 때는 소주 한 궤짝을 깔고 앉아 그것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주(酒)재근’이다. 김재근은 예나 지금이나 야생마 같이 빠른데 그는 그것이 주력(酒力)에서 온다고 기염을 토했다. 전국 고등부 체전 단거리 기록 보유자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군기반장이라는 악역을 맡아 후배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런 김재근과 술자리에 합석한 후배들은 초긴장을 했다.

행여 실언이라도 하면 주먹부터 날아들기 때문이다. 한국 산꾼의 과제였던 토왕성빙벽을 깨기 위한 첫 실험무대로 1975년 그는 강촌의 구곡폭포 빙벽에 붙었다. 야수 같은 괴력을 발휘해 장장 8시간 40분 동안 사투한 끝에 빙폭에 올랐다. 수직빙벽 등반의 가능성을 입증한 실험적 등반이었다.

그는 클라이밍 보다는 고산등반 체질이지만 한번도 고산에 가서 힘을 쓰지는 못했다. 77년 한국산악회(이하 한산)가 계획한 안나푸르나1봉 원정계획은 아홉 차례의 훈련이 끝난 뒤 출발 직전 예산 부족으로 취소됐다. 김재근은 대원 중 유동옥(크로니산악회) 한정현(한양대O.B) 등과 주량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용호상박이었다.

한정현은 원정이 취소된 뒤 목숨을 끊었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자리에는 ‘설왕설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갑니다’라는 유서와 혼자 마신 소주병이 남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한산 안나푸르나4봉 원정대(대장 전병구)가 꾸려졌다. 유동옥은 동상으로 발가락 10개를 절단하는 대가를 치르며 정상을 딛고 섰으나 김재근은 원정대에 끼지 못했다.

그와 쌍벽을 이룬 호방한 기질의 이휘구(요델산악회) 또한 만만치 않은 주당이다. 보통 2박3일 술을 마셨으며 술 대결에서는 김재근의 호적수다. ‘아이거 박’이란 별칭을 지닌 토왕성빙벽 초등자 박영배 또한 누구에게 지지 않는 술꾼이다. 만화가 박영래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악돌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그는 술자리에서 해학과 유머 넘치는 입담을 쏟아내며 산꾼 모두를 안주로 올린다. 그는 “내 안주 감이 되지 못하면 별 볼일 없는 산꾼”이라고 말한다. 산악계의 애경사를 모두 챙기는 훈훈한 인정의 소유자인데 얼마 전 딸 결혼식에서는 주례로부터 “이제는 사위도 보았으니 절주하는 게 좋겠다”는 당부를 받기도 했다.

한국 산쟁이 중 살아있는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문무 겸비의 학구파 신승모. 그는 주량이 소주 한잔이지만 가끔 보약대용으로 술을 즐긴다. 어느 해 여름, 그와 나는 설악산 울산암에 갔다.

내가 먼저 오른 뒤에도 그가 바위에 붙을 생각을 접은 채 주위를 살피면서 분주히 움직였다. “승모야! 빨리 등반 끝내고 오징어 회 먹으러 속초에 가자”라고 소리쳤다. 그는 뒤늦게 허둥대며 올라왔고 무엇인가 꿈틀대는 군용양말을 허리에 차고 다가왔다. “형님, 오늘 횡재했습니다. 이 양말 속에 사삼(蛇參ㆍ살모사)) 한 마리 챙겨 넣었습니다. 사주를 담가 체력 보강에 쓰겠습니다.”

그날의 신승모는 영락 없는 땅꾼의 모습이었으며 우리는 집에 돌아와 보신용으로 사주를 담가 먹었다.

1982년 마칼루 원정(대장 함탁영)에 나선 그는 최종 캠프까지 진출해 허영호의 등정을 지원했다. 사주를 복용한 탓인지 그는 한번도 고소증세에 시달리지 않았다.

당시 원정대에는 허 욱(서울등산학교 교장) 허정식(은벽산악회) 남선우(월간 마운틴 대표) 이찬영(보성고 O.B) 송병민(토왕성빙벽 단독 초등자) 신형기(연세대 국문과 교수) 허영호 등 걸출한 산쟁이가 모여있었다.

이 등반에서 허영호는 세계적인 등반가 예지 쿠쿠츠카가 81년 가을 정상에 놓고 온 무당벌레 마스코트를 증거물로 갖고 내려와 미등정 의혹에 휩싸인 쿠쿠츠카의 마칼루 단독등정을 증명했다.

그 멤버 중 허정식은 타고난 바위꾼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당이었다. 저 세상 사람이 된 이찬영은 한국 최고의 폐활량을 지녀서 7,500m 이상의 고소 캠프에서 10일 이상을 머물고도 건재했다.

한때 누룩을 갖고 원정을 나간 팀이 있었다. 특히 국법에 술의 반입을 금지한 파키스탄 같은 곳에 갈 때 그랬다. 긴 원정기간 중 사기 진작의 방편으로 막걸리를 빚어 마시는 일은 애주가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고소 환경에서 음주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력(酒力) 아닌 주?走力)을 위해 마시는 것이라면 변명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누룩까지 지니고 떠나는 등반대라면 그 팀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산악인 이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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