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고려대 산하 아시아문제연구소는 ‘공산권 연구 총서’를 기획했다. 통일을 민족의 염원이라 부르짖었지만 실제 북한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피지기의 과학적 연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게 공산권 연구 총서 발간의 목적이었다.
그 연구총서 중 하나가 김준엽(88ㆍ사회과학원 이사장), 김창순(2007년 작고ㆍ북한연구소 이사장)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다. 총 5권의 이 저작은 두 분이 40대 초에서 50대 중반을 넘어서는 인생의 황금기를 다 바쳐 펴낸 필생의 노작이다. 62년 연구에 착수해 76년에 마지막 제5권이 나왔으니 무려 15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한국공산주의>
저자들은 ‘황무지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의 첫 단계인 자료 수집의 벽이 너무나 높았다. 이 저술과 관련된 것으로 한인에 의해 작성된 체계적인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혹 단편적인 것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은 가혹한 일제치하에서 지하투쟁으로 전개된 까닭에 어느 부분의 단편적인 기록만 가지고서는 전체의 진실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통치기관의 문서를 섭렵하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외국에 나가서 자료를 수집하고 반입하는 일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또 그것을 입수했다 하더라도 그 기록이 말하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의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1961년 5ㆍ16군사혁명으로 반공국시 제일주의가 선포된 당시의 분위기와 우리나라의 좌파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형편에서, 독립운동사상의 좌파의 위치를 실증적으로 밝히려는 도전은 분명히 어려움을 넘어선 일종의 무리한 일임에 틀림없었다”고 적고있다.
하지만 북한의 역사 날조를 마냥 바라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자들은 북한의 독립운동사를 왜곡하려는 모든 시도를 물리치고, 또한 앞으로의 민족통일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무력함을 절감하면서도 엄청난 과제에 도전한 것이다.
1권에서는 볼세비키 혁명 이전의 러시아의 한인들 모습을 다루기 시작,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루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생성 과정, 그 두 당의 군권투쟁, 코민테른의 개입에 따른 양당의 해체 등을 다루고 있다.
제2권은 3ㆍ1운동의 좌절로부터 1926년 6ㆍ10만세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의 민족운동 내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움직임을, 3권은 6ㆍ10만세운동으로 발단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이 있은 때로부터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재건 지령이 있기 까지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4권은 만주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 한인에 의해 조직적인 효시를 보게 되었고 또 그 성장도 급진적이었다.
만주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산발적인 한인공산주의 조직의 형태를 개관하고 그것들이 조건공산당 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에 흡수돼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과정을 살피고 아울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의 조직 및 활동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5권은 한인공산주의운동의 여러 양상 및 각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특히 박헌영에 의한 재건통일조선공산당의 성립과 북한에서의 북조선노동당 출현에 의한 일국일당원칙의 파괴 및 조선공산당의 전일성(全一性)부인까지를 주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다.
■ 김준엽, 독립운동·학자의 길 매진 김창순, 국내 북한연구의 1세대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을 이 시대의 진정한 원로로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항일독립운동과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김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에서 드물게 별다른 도덕적 상처 없는 지조 있는 지식인으로 존경 받아왔다.
평북 강계 출신인 김 이사장은 1944년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갔다. 중국에서 장준하 등과 탈출해 충칭의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에 가담,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광복군 제2지대장 등의 부관을 지냈다. 그는 일제 하에서는 김구 주석 밑에서 임정신문을 만들었던 광복군 소령으로, 해방 후에는 50년 넘게 학자로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김 이사장의 일생의 신조는 "생일상을 차리지 않겠다는 것과 벼슬을 안하겠다"는 것. 실제로 각 정권으로부터 12차례나 총리 등 관직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82년 고려대 총장에 취임한 김 이사장은 85년 전두환 정권의 압력에 맞서다 사임, 88년 사회과학원 이사장을 맡으며 중국과의 학술문화교류에 전력하고 있다. 지금도 아흔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정정하게 중국을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중국내 일류대학 11곳의 명예교수 직함이 찍혀 있다.
김 이사장은 그의 회고록 <장정> 의 5권 머리말에 "망국의 쓰라림과 민족해방 투쟁, 한국전쟁, 그리고 이런 역경을 딛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를 늘 반성하며 살아왔다"고 적었다. 장정>
또 한명의 저자 김창순 북한연구소 전 이사장은 국내 북한연구의 1세대다. 그는 안타깝게도 지난 3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북 의주 출신인 고인은 만주 국립대 하얼빈학원에서 러시아사를 전공하고 광복 후 북한에서 평북신보사와 평북인민보사 주필, 신의주 동방사회과학연구소장, 북조선기자동맹 창립중앙위원, 민주조선사 총무국장 등으로 언론계에 종사했다.
49년 반혁명분자로 검거돼 투옥됐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탈출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김 이사장은 평생을 북한 연구에 헌신해왔다.
육군 정훈학교 강사를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 반공과 지공(知共)의 관점에서 북한을 본다. 사실관계와 정보를 중요시하며 이를 통해 북한 체제의 허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북한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보다는 공산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내재적 힘의 축적에 의한 평화공존의 추구를 지향해야 한다"며 71년 북한연구소를 세우고 북한학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북한학보> 를 창간하고 북한학회를 창설하는 등 북한연구를 학문의 개념으로 올려놓은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학보>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