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출발이 산뜻하다. 당선이 확정된 직후 "매우 겸손한 자세로, 매우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다짐한 대로 낮고 겸손한 언행이 이어지고 있다.
BBK의혹으로 자신을 거세게 몰아붙였던 대통합민주신당을 향해서는 "여야는 서로 적이 아니고 필요한 반대자"라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마음의 응어리를 자신부터 풀겠다고도 했다.
■ 국내외에서 쏟아지는 찬사
곧 청와대를 비워야 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전임자 존중의 전통을 세워야 할 때"라며 우호적인 신호를 보냈고, 술렁이는 공직사회를 향해서는 "불안해 하지 말라"고 다독거렸다. 당권ㆍ대권 분리 당헌 개정 목소리를 둘러싼 한나라당 내부 갈등을 가라앉히는 수완도 돋보였다.
이런 모습에 그를 찍은 사람들은 자랑스러워 하고, 표를 주지 않은 사람들도 "괜찮아 보이네"라며 슬며시 닫힌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
거기에 '화합 속의 변화' '성장의 혜택이 서민과 중산층에게 돌아가는 신발전체제'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의 기회가 넘쳐 나는 나라'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실용주의 외교' 등 듣기 좋은 말들이 이어지니 기대가 부풀지 않을 수 없다. 나라밖 언론들의 찬사도 쏟아지고 있다.
이 당선자가 애정 어린 비판은 북한 사회를 건강하게 할 수 있다며 인권문제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미국 보수언론의 칭찬이 자자하다. 외국 언론들은 특히 한국이 실용주의 CEO형 대통령을 맞게 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은 계산서가 필요 없는 말들의 성찬에서 현실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이 당선자에게 몰린 과도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 투표소의 '2,274 대 88'(이명박 대 정동영)은 종부세 양도세 등 세금폭탄을 경감해 달라는 극명한 요구이다. 하지만 참여정부가 대못을 박은 부동산세제를 바꾸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손을 댄다 해도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자칫 부동산 시장이 꿈틀거리기라도 했다가 다수 국민들로부터 쏟아질 원성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성장을 앞세워 그 혜택이 서민과 중산층에게도 돌아가게 한다는데, 정권만 바뀌면 당장 자신의 생활이 나아지거나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대북정책에도 함정이 있다. 이 당선자의 '비핵 개방 3,000' 공약은 북한이 핵 포기의 결단을 내린다면 10년 이내에 현재 520달러 수준인 북한 주민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끌어 올려준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당선자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핵 포기 결단을 내려주면 문제는 쉽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면 체제 보장과 막대한 경제지원을 해주겠다는 설득과 유인은 이전에도 많았다.
김 위원장을 설득할 수 있는 '실용주의' 방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농축우라늄 계획을 포함한 핵 프로그램 연내 신고 완료를 놓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데 북한에 할 말을 하겠다는 이 당선자에 대해 북한은 대선이 끝난 지 1주일이 되도록 아무런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다.
■ 이제 말의 성찬을 끝낼 때
이 당선자가 내세우는 실용주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노 대통령도 자타가 인정하는 실용주의자였다.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했고 친미자주 노선을 표방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대책 등에 대한 실용주의 노동정책, 이라크 파병, 한미 FTA체결 등 실용주의 외교는 핵심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했고 그 결과가 신당 후보의 참패였다.
이 당선자의 실용주의도 같은 운명에 처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보수 실용주의는 정통 보수로부터 라이트 훅을, 진보진영으로부터 레프트 강타를 얻어 맞기 십상이다.
그 집중타를 견딜 수 있으려면 맷집이 강해야 한다. 이 당선자 앞에 놓인 수많은 과제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다. 이제 말의 성찬을 끝내고 팍팍한 현실로 돌아와 맷집을 단단하게 키워야 할 때가 되었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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