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24일부터 12월22일까지 미국 국무부의 ‘국제방문자프로그램(IVP)’에 초청돼 미국을 둘러봤다. 미국 땅을 밟아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그 나라에 가본 적이 없다. 미국 국무부가 보기에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어서 제 나라 구경을 시켜줬을 것 같지는 않고, 그 무렵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던 C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C는 1980년대 중반 <코리아타임스> 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선배다. 미국 국무부의 초청을 받기 한 해쯤 전 그 C 선배와 저녁을 먹은 적이 있는데, 내가 미국엘 가보지 못했다는 말을 그 자리에서 듣고 그가 좀 놀라워했던 게 기억난다. ‘극동의 변두리’에 붙박여 따분하게 사는 신문사 후배에게 잠깐이라도 너른 세상 구경을 시켜줘야겠다는 (‘선배다운!’) 생각이 그 때 그에게 들었던 것 같다. 내 짐작에 그렇다는 것이다. 코리아타임스>
나는 엉겁결에 고른 ‘미국 사회체계와 미디어’라는 주제를 건성건성 어루만지며, 한 달간 일곱 개 도시를 둘러보았다. 수도 워싱턴에서 시작된 그 여정은 보스턴, 세인트루이스, 잭슨, 댈러스, 앨버커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끝났다. 더러 다른 도시들을 스치기도 했지만, 잠을 잔 도시는 이 일곱 군데였다.
미국은 적잖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외국이다. 요즘, 먹고 살 만한 집 아이들은 그 나이 때의 내 세대 사람들이 이웃 도시에 다녀오듯 쉽사리 태평양을 건넌다. 그러니,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나흘씩 머물렀던 미국 도시들에 대해서 뭔가 말을 늘어놓는 것이 스스럽기는 하다.
게다가 나는 미국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실내에 머물 때가 많았다. 적잖은 돈을 들여 한 이방인을 제 나라에 데려온 미국 국무부가 그를 자유롭게 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국무부가 정해놓은 대로 끊임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하루 일정을 끝내면, 짧은 겨울 해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주말을 빼놓으면, 나는 대체로 어둠 속 도시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되돌아볼 미국 도시들의 기억은 그야말로 단편적 기억들, 찰나의 인상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주마간산의 기억과 인상에도 그 나라와 그 도시들의 진실 한 자락은 담겨있을지 모른다.
미국 국무부는 한국계 미국인 L 선생을 내 가이드 겸 통역으로 붙여주었다. 프로그램이 빈 주말을 제외하곤, 나는 한 달 내내 거의 L 선생과 함께 다녔다. 그는 내 보호자이자 관리자였다. 일정이 세세히 계획되고 관리자가 딸린 여행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낯선 곳에서 허둥대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장점이다.
국무부가 프로그램을 촘촘히 짜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워싱턴에서 여러 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과나 언론사, 언론 관련 단체들을 효율적으로 방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쪽 세계의 힘있는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L 선생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공식 프로그램으로 꽉 찬 엿새 동안의 워싱턴 일정에서 알링턴 국립묘지(워싱턴 시내가 아니라 포토맥강 건너 버지니아주에 있다), 링컨기념관, 제퍼슨기념관과 이런저런 국가기관들, 박물관들을 효율적으로 둘러볼 짬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그런 관리와 계획의 열매인 효율이, 여행의 큰 맛 가운데 하나인 우연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단점이다. 미국에서의 한 달 동안, 나는 미국 국무부가 나를 그냥 제멋대로 놀도록 내버려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했다. 보호자 겸 관리자를 내게 붙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불편한 점이 많기는 했을 것이다. 낯선 세계와 직접 맞부딪쳐야 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 불편함을 헤쳐나가려는 자발성을 통해, 나는 미국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 같기도 하다.
포토맥 강변에 자리 잡은 워싱턴은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에 둘러싸여 있다. 정식 이름은 워싱턴 D.C.고, 줄여서 그저 D.C.라 부르기도 한다. D.C.는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칭이다. 컬럼비아 특별구는 미국의 어떤 주에도 속하지 않는 특별행정구역이다.
연방의회의 직접 관할 아래 있는 탓에, 지방정부의 힘이 다른 주정부에 견줘 약하다. 오늘날엔 워싱턴시와 컬럼비아특별구가 동일한 실체로 간주되지만 본디 워싱턴은, 1871년 이 도시에 통합된 조지타운처럼, 컬럼비아 특별구 안의 한 도시였다.
2001년 11월의 워싱턴과 함께 떠오르는 감회는 크게 셋이다. 첫째는 내 영어가 내 짐작보다 형편없었다는 것. 미국만이 아니라 영어권 사회에 발을 디뎌본 것이 처음이긴 했으나, 나는 내심 내 영어를 썩 쓸 만하다 여기고 있었다. 젊은 시절 영어신문사에서 다섯 해 동안 일하기도 했고, 유럽에 살면서도 영어로 말할 기회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영어로만’ 오래도록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내 영어는 쉽게 바닥을 드러냈다.
국무부를 대리해 ‘국제방문자프로그램’의 실무를 맡고 있던 펠프스 스토크스 재단에 등록할 때부터 L 선생은 내 옆에 있었는데, 그가 단지 내 ‘관리자’로서만이 아니라 ‘통역’으로서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지나며 혀가 풀리긴 했으나, 그래도 L 선생과 떨어져있을 땐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
하루에도 몇 꼭지씩 영어 기사를 쏟아내던 20대 때를 생각하며, 또는 유럽의 술집에서 여러 나라 친구들과 영어로 시시덕거리던 30대 때를 생각하며 은근히 지녔던 자신감은 망상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유럽 친구들과 어울릴 땐 한 자리에서도 두세 언어를 자주 ‘스위칭’했던 것 같다. 내 쪽이든 상대방이든 영어가 막히면 스페인어로, 스페인어가 막히면 프랑스어로.
워싱턴 기억 속의 두 번째 감회는 거리에서 나풀거리던 스페인어다. 내가 워싱턴에 도착한 11월24일은 토요일이었다. 프로그램은 월요일인 26일에 시작될 예정이었던 터라, 나는 25일 일요일 하루를 무작정의 시내 산책으로 보냈다. 일요일이었던 데다 종일 겨울비가 와서, 거리에 사람들이 붐비진 않았다.
흑인 인구가 다수인 도시답게 거리에서 주로 흑인들을 스쳤는데, 자기들끼리 스페인어를 주고받는 이들이 적잖았다. 그것은 두 겹의 이국주의로 내 마음을 잠시 설레게 했다. 한국 바깥의 이국주의와 영어 바깥의 이국주의 말이다. 물론 나는 텍사스나 뉴멕시코나 캘리포니아처럼 역사적으로 스페인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적잖은 미국인들이 스페인어를 쓴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듣는 스페인어라니.
게다가 나는 그 때까지 스페인어를 쓰는 흑인을 떠올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흑인들이 쓰는 유럽어는 프랑스어나 영어여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라틴아메리카를 흑인과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왜 스페인어를 쓰는 쿠바의 흑인들,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의 흑인들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왜이겠는가? 머릿속이 선입견으로 그득 차있어서 그랬겠지.
그 두 겹의 이국주의 가운데 적어도 한 쪽은 슬픈 이국주의였다. 영어와 스페인어의 경계는 워싱턴에서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계급 경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어는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이나 중산층이 되려 애쓰는 이들의 언어고, 스페인어는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의 언어였다. 워싱턴에서야 스페인어를 쓰는 이들은 흑인들 가운데서도 소수일 테다. 그 소수의 흑인들, 스페인어를 쓰는 흑인들은 두 겹의 주변성을 지닌 셈이다. 피부빛깔의 주변성과 언어의 주변성 말이다.
워싱턴 기억 속의 세 번째 감회는 두 번째 감회와 이어져 있다. 피부 빛깔과 언어에 이은 또 하나의 계급분단선. 이번에는 공간적 분단이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튿날 시내를 쏘다니며 그리도 흔히 마주쳤던 흑인들을 프로그램이 시작된 뒤로는 그렇게 흔하게 볼 수가 없었다. 워싱턴을 떠날 때가 돼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워싱턴에서의 내 동선이 소위 북서사분면(北西四分面: Northwest quadrant. 흔히 NW로 줄여쓴다)에 갇혀있었던 탓이다. 내가 머물던 호텔 엠버시 스퀘어 스위츠나 프로그램 등록을 했던 펠프스 스토크스 재단만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따라 내가 워싱턴에서 방문했던 기관들은 죄다 북서사분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워싱턴을 북서, 북동, 남서, 남동 네 구역으로 나눠보면, 나머지 세 구역은 압도적으로 흑인 지역인 데 비해 북서구역은 압도적으로 백인구역이다. 그것은 북서구역이 나머지 세 구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유한 구역이란 뜻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가본 나라의 이 인공적으로 아름다운 수도는, 바로 그 나라가 그렇듯, 계급 분단선이 너무나 또렷한 도시였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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