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구조조정본부가 김용철 변호사 등 명의의 차명계좌를 개설한 장본인이라는 진술이 나오면서 삼성 비자금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누가’라는 의문의 1단계가 풀린 만큼 ‘왜’ ‘어떻게’ ‘얼마나’ 등 다음 단계의 의문들로 수사 초점이 빠르게 옮겨질 전망이다.
이미 문제의 계좌들이 삼성 차명계좌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삼성측이 개설한 것으로 보이는 차명계좌’와 ‘삼성 구조본이 개설한 차명계좌’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구조본은 삼성그룹이라는 공룡을 좌지우지하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더 이상 차명계좌 사태를 삼성 계열사나 개인의 ‘재태크’나 ‘탈선’ 정도로 치부하기는 어렵게 됐다는 의미다.
차명 관리 자금의 규모도 어림잡을 수 있게 됐다. 도곡지점 계좌수가 33개이고 김 변호사 명의의 1개 계좌 자금이 26억원(2004년10월 현재) 상당임을 감안할 때 증권사 1개 지점에서만 수백억원을 관리했다는 계산이 가능해진다. 특수본부가 차명계좌의 숫자를 500여개로 잡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차명으로 관리한 자금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이에 따라 구조본의 누군가는 금융실명법 위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차명계좌 개설은 엄연히 금융실명제 위반이다. 도용(盜用)계좌가 있다면 형법상 사문서 위조 등 혐의가 추가될 수 있다. 물론, 500여개 차명 의심계좌 역시 구조본이 개설했는지, 구조본의 누가 총지휘자인지, 삼성 최고위층의 개입은 없었는지 등으로 수사범위 확대도 불가피해진다.
돈의 성격으로 수사 초점이 옮겨가면 파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이미 특수본부는 차명계좌에 보관된 자금을 ‘삼성 비자금’으로 잠정 결론내렸다. 특검팀에서도 관점이 유지된다면 각 계열사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조성한 것인지, 분식회계 등 회계조작은 없었는지 등도 따져봐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역시 돈의 사용처다. 이미 일부 자금이 고가 미술품 구입에 사용됐다는 정황은 포착됐다. 이 자금이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받았다가 되돌려준 500만원, 정ㆍ관계 고위 관계자들에게 전해졌다는 ‘떡값’의 출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법처리 대상이 구조본 이상이 될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삼성측에서 구조본이 비자금 조성 및 사용, 차명계좌 개설ㆍ관리를 총괄 지휘했다고 주장할 경우 더 이상의 수사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본 이상의 존재를 처벌하려면 이들이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직접적 물증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박진석 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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