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20일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국정운영의 비전으로‘선진화’라는 아젠다(의제)를 던졌다. 그는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대의 요구”라고 말했다.
그가 내세운 선진화 아젠다는 뿌리가 깊다. 이 말은 2004년 이후 한나라당을 지배해온 용어이고, 한나라당 역사가 함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화 용어의 저작권은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갖고 있다. 박 교수는 2004년 4월 총선 직전 당시 박근혜 대표가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 한나라당에 입성한다.
이후 초선으로는 이례적으로 한나라당 싱크 탱크인 여의도 연구소장을 맡은 박 교수는 수개월 작업 끝에 국가 비전과 한나라당의 집권 전략으로 ‘선진화’를 제시한다.
2004년 8월 구례 연찬회에서 박 교수는 주제 발표를 통해 “한나라당은 선진화 세력을 조직화해 21세기 신보수 발전적 개혁 보수의 이념정당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천명한다.
당시 박 교수가 제시한 선진화를 박 전 대표도 여과 없이 수용했다. 한때 한나라당의 당명을 ‘선진한국당’으로 바꿀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당시 선진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사들로는 윤건영 박형준 박재완 의원 등이 있는데 이른바 박세일 사단으로 불렸다. 박형준 윤건영 의원은 현재 이 당선자의 핵심 이데올로거이다.
당시 이들은 대북, 경제, 사회 등 각 분야를 망라해 선진화 비전을 정리했다. 하지만 당내 정통 보수 의원들의 시각은 곱지 않았다. 박 교수의 선진화 아젠다가 ‘보수’보다는 ‘중도’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2005년 3월 행정도시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상황이 변한다. 박 교수는 법 통과에 항의해 당직은 물론, 의원직까지 내던진다. 박 교수는 지금도 수도이전정책을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책”으로 꼽는다. 이후 윤건영 의원도 여의도 연구소 문건유출 파문으로 물러나는 등 박세일 사단은 당내 비주류로 전락한다.
당은 다시 강경 보수쪽으로 기운다. 한나라당의 정책 분야도 정통보수를 표방하는 의원들이 주축인 된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박 교수가 당을 떠났지만 박 교수가 정리해 놓은 선진화 아젠다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박 전 대표도 자신이 집권할 경우의 비전으로 선진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당내 경선 때도 ‘5년안에 선진국’을 모토로 내걸었다. 물론 박 전 대표를 보좌한 정책 라인이 유승민 의원 등 상대적으로 정통보수 성향이다 보니 ‘선진화’틀 안에 담긴 내용도 보수 색채가 짙어진다.
의원직을 사퇴한 박 교수는 ‘선진화정책 포럼’을 만들어 자신의 선진화 정책을 전파한다. 이 때 행정도시 이전 문제를 두고 교감하고 있던 이 당선자의 눈에 ‘선진화’ 화두가 띄게 된다. 당시 선진화 정책 포럼에는 이 당선자 싱크탱크의 좌장격인 서울대 유우익 교수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어 2006년 말 당내 경선에 본격 참여한 이 당선자의 캠프에 윤건형 박형준 의원 등 박세일 사단이 결합한다. 오랜 우회 끝에 선진화가 이 당선자의 집권 비전으로도 낙착된 것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이미 선진화를 적극적으로 내걸고 있어 이 당선자측에선 전면에 부각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내놓은 아젠다가 ‘신발전체제’이다. 사실 박 교수는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선진화 전략’에서 선진화와 신발전체제의 개념을 모두 체계화하는데 ‘선진화’는 21세기의 국가모토이고, 신발전체제는 선진화를 달성하기 위한 경제적 패러다임을 지칭한다. 이 당선자 측에선 선진화 보다는 ‘신발전체제’를 더 앞 세운다.
박재완 의원은 “같은 선진화를 얘기하지만 박 전 대표가 조금 오른쪽이고 이 당선자는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색채가 풍기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그 틀은 같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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