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을 부려도 좋다. 환상도 상관없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이면 또 어떠랴. 그것으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거짓’임을 알망정 잠시나마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맘때 한번쯤은 ‘기적’이 일어나도 괜찮다. 내가 아니라도 좋다. 거창하게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닌 작은 만남, 성공, 사랑, 기쁨이라도 좋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눈치는 영화가 빠르다. 온갖 아이디어와 방법을 동원해 기적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열 한 살 난 소년은 정말 기적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재능과 우연의 연속으로 엄마 아빠를 만나고(‘어거스트 러쉬’),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도쿄의 한 아기 역시 온갖 위험을 피해 부모 품에 돌아가고, 그 기적을 만든 주인공인 노숙자는 복권 1등에 당첨된다(‘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1,000만분의 1 확률인 무작정 부모 찾기와 복권당첨 뿐이랴. 65세 이후로는 늙지않아 무려 243세가 된 장난감 발명가 마고리엄의 <장난감백화점> (사진)에서도 기적은 일어난다. 그가 떠나자 생명을 잃어버린 장난감들. 그러나 가게를 이어받은 평범한 소녀 몰리(나탈리 포트만)의 ‘마법’에 의해 그들은 다시 살아 숨쉰다. 장난감백화점>
영화는 동화 속 인물을 뉴욕 한복판에 살아있는 인간으로 나타나게 해, 결혼까지 시킨다(‘마법에 걸린 사랑’). 이런 상상만 있는 것도 아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는 1914년 12월 24일 밤 프랑스 북부 전장에서 실제로 있었던 기적 같은 프랑스 영국 독일군 사이의 ‘크리스마스 휴전’ 을 이야기 한다. 메리>
영화가 마법과 상상, 환상과 우연을 아무리 동원한들 기적에 관한한 예수를 따를 자가 있을까. 그래서 그가 태어난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더 ‘기적’을 바라고,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물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화도, 예수의 기적도 다 환상이고 우연일 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기적이란 없는지 모른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의 가능’이 아니라, 단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의 실현. 어느날 갑자기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땀과 눈물과 정성이 쌓여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 단지 거기에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연주를 하는, 간발의 차이로 자동차 사고를 피하는, 하필이면 그때 마음씨 착한 남자를 만나는 약간의 우연과 행운이 조금 따랐을 뿐.
영화가 됐든, 예수가 됐든 그런 ‘기적’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간절함. 성서에서도 ‘간절히 원하면 주신다’고 했다. 간절함이란 모든 마음과 노력을 쏟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엄마 아빠를 찾아야 한다는 간절함은 어거스트에게 음악으로 소통하는 길을 열게 했고, 사랑의 간절함은 동화 속 공주를 뉴욕에 남게 해주었다. 궁중에 매달려 떨어지려는 친구를 구하려는 절박한 마음이 <마녀 배달부 키키> 로 하여금 하늘을 나는 마법을 되찾게 해주었다. 마녀>
그리고 기적은 선을 지향해야 한다.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타적이어야 한다. 기적은 그 사람의 인격, 성품과 조화를 이룬다. 영화 주인공들을 보라. 예수를 보라. 19일 대선에서 몇몇 후보들은 ‘기적이 일어날 것’ 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적은 결코 없었다. 이유가 기적의 조건들을 갖고 있지 못한 그들 자신에게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대현 문화대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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