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안이든 깊이 파헤치면 한둘은 나올 갈등까지 이번에 솔직히 털어 놓으려 했는데, 장가 안 간 아들이 나중에 결혼할 때 안 좋다며 극구 말리더군요. 그것 빼 놓고는 다 실었어요.” 전문번역가로 생활한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번역가 이종인(53)씨는 주변의 사실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일이 만만찮은 일임을 절감했다.
적나라한 갈등 묘사에 부인마저 “사람을 왜 우습게 만드느냐”며 강력 항의하는 바람에 70매에 달하는 문제의 글은 결국 통째로 덜어내야 했다. 그룹 퀸의 노래 제목을 따서 ‘누군가는 당신을 사랑해(Someone Still Loves You)’라며 제목까지 달아 두었는데, 다음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10년 전부터 틈틈이 써 둔 수필 29편을 정리한 ‘지하철 헌화가’에는 그의 체취와 삶의 풍경이 오롯이 배어 나온다(즐거운 상상). ‘프로이트와 모세’, ‘미술의 정신’ 등 쉴새 없이 몰려드는 바쁜 번역 작업 틈틈이 벼려둔 글 솜씨 덕에 “번역과 글이 다 되는 필자”로 통하는 그가 이름값을 한 셈이다.
1년에 10권씩, 정확히 모두 140권을 옮겨 낸 이씨는 국내 전문 번역가 20여명 중 한 명. 현재 10쇄를 헤아리고 있는 ‘음모론’(이마고 발행)은 스테디셀러의 문턱을 넘어섰다. “지하철에서 그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흐뭇하죠. 리더십처럼 일반이 관심 많은 책을 내면 강연 부탁도 들어와요.“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큰 번역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3년째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는 이제 라틴어로 읽을 수 있어요.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려면 2년은 더 공부해야 해요.”
에드워드 기번의 대작 ‘로마 제국 쇠망사’를 뛰어 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400쪽 짜리 10권으로 돼 있는 그 책이 국역된 것이라곤 다이제스트 번역뿐이다. “요즘 인기 끄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영미권의 로마 관련서에 비긴다면 품격이 하늘과 땅 차이죠. 라틴어 원전은 거기서 또 한번 천양지차예요.”
그러나 옮겼다 해서 끝이 아니다. “과연 30편은 족히 될 그 책을 펴내겠다고 나설 출판사가 있겠느냐는 거죠.”
책을 한 번 내고 나면 꼭 돌아가신 모친이 생각난다. “나는 불효자였어요. 어머니의 질책에 변명만 늘어놓던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의 팔자일까, 그는 “어머니에 관해 글을 써 둔 게 세 편”이라고 했다. “나이들수록 간절해지는 선친에 대한 생각을 옮긴 ‘아버지 생각’이 이번 글에서 가장 애착이 가요.”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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