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찌들었던 포항 소년에서 성공한 기업인과 지방자치단체장으로 거듭났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마침내 한번 더 비상(飛翔)에 성공했다.
이명박. 그에겐 늘 일과 성공이란 두 상징어가 따라 붙는다. 야간상고를 나온 가난한 시골학생이 30대 사장, 50대 국회의원, 60대 서울시장에 이어 마침내 대통령까지 된 성공스토리는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샐러리맨의 신화', '청계천 복원의 신화'에 이어 그는 이제 '성공한 경제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신화 창조를 꿈꾸고 있다.
이 당선자는 자서전 <신화는 없다> 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신화는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만 신화일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신화는 없다. 다만 용기를 가지고 바른 길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의 성실한 노력이 있을 뿐이다." 신화는>
'굴 껍데기'처럼 달라붙은 가난
이 당선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의 미에(三重)현에서 아버지 이충우씨와 어머니 채태원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셋째 아들, 다섯째로 태어났다. 밝을 명(明), 넓을 박(博).
어머니 치마 품 안으로 보름달이 뛰어드는 태몽을 갖고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목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광복이 되자 가족을 이끌고 45년 11월 경북 포항시로 돌아왔다. 이 후보가 4세 때였다. 하지만 귀국선이 대마도 인근에서 가라앉아 그의 가족은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모두 잃었다.
그는 <신화는 없다> 에서 "가난은 굴 껍데기처럼 우리 가족에 들러붙어 있었다"고 비유할 정도로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살았다. 신화는>
포항 판자촌에 살았던 어린 시절 영양실조에 걸려 드러눕기 일쑤였고 가족의 생업을 위해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잔심부름을 해야 했다. 6ㆍ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누나(귀애씨)와 막냇동생(상필씨)을 잃기도 했다.
이 무렵 이 후보 가족의 주식은 '술지게미'였다. 곡식으로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인 술지게미로 아침을 때우고 등교하면 그의 얼굴은 알코올 기운으로 늘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그는 중ㆍ고교 시절 김밥ㆍ엿ㆍ아이스께끼ㆍ뻥튀기 장사 등을 하며 장학금으로 포항중,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고교 졸업 후 빈손으로 상경한 이 후보는 청계천 책방에서 헌책을 얻어 독학해 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제 "가난은 성공을 향한 각성제였고, 정치인이 된 뒤로는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돼줬다"고 말한다.
학생운동 경험이 성격 바꿔
대학 3학년 때 상과대학 학생회장 출마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 당선자는 형제들 가운데 체구가 가장 작고 남 앞에 나서길 꺼려했다. 그런 그가 "포항 촌놈이 왜 나서느냐"는 비아냥 속에 출마를 감행해 40표 차이로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이듬해인 64년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자격으로 6ㆍ3반대 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죄목은 국가내란 선동죄였다.
수감시절 그의 어머니가 면회 와 "소신대로 행동해라. 어미는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 말은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당선자의 어머니는 그가 출감한 후 한달 만에 세상을 떴다.
이후 이 후보는 학생운동과 거리를 둔다. 나중에 그는 "학생운동은 순수한 열정에 바탕한 문제 제기에 그쳐야지 그것을 해결까지 하려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후보 주위에서는 "학생회장, 학생운동 경험이 내성적인 성격을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꾼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샐러리맨 신화
현대그룹에서의 27년은 그에게 새 인생이나 다름 없었다. 현대건설 입사부터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65년 당시 학생운동 경력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길이 막혔던 이 당선자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 이낙선씨를 만나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 당선자는 69년 29세의 나이에 이사에 오르고, 입사 12년 만인 35세에 사장이 될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현대그룹 시절 태국 공사 현장에서의 일이다.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인부들이 폭도로 변했다. 당시 경리과 직원이던 이 당선자는 "금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폭도들 앞에서 버텼다. 단도가 목 옆으로 날아가고 발길질이 시작됐다.
때마침 경찰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일로 그는 회사에서 영웅이 됐다. 협력업체가 청와대 공사를 이유로 골재 납품을 미루자 아예 골재회사 앞 도로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불도저'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리틀 박정희'였다. 박 전 대통령과 인상이 닮은 데다 일을 저돌적으로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신군부?중공업 중복투자를 쇄신하겠다며 현대에 자동차를 포기하고 발전설비를 택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가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아 무산시킨 것도 유명한 일화다.
현대 이사 시절인 70년 이 후보는 이화여대 사범과를 졸업한 김윤옥씨를 만나 결혼했다. 신혼 생활은 마포의 14평짜리 사글세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굴곡진 정치 역정
이 당선자는 92년 1월 3일 현대그룹을 나와 같은 해 4월 민자당 전국구 의원이 됐다. 당시 정계 진출을 선언하고 통일국민당 후보로 대선에 뛰어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맞대결을 피하기 위해 전국구를 택하긴 했으나, 현대가에선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최근까지도 현대가와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몽준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 및 지지 선언으로 화해에 성공했다는 평이다.
그의 정치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96년 4ㆍ11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19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선거자금 초과지출을 폭로한 김유찬 당시 비서관을 해외로 도피시킨 혐의도 인정됐다. 그는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며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여러 번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후 미국으로 떠난 이 당선자는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1년 간 연수생활을 하면서 와신상담했다. 워싱턴 근교 좁은 아파트에서 가구도 들여놓지 않은 채 빈 박스를 엎어 그 위에 전화기를 올려 놓은 초라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엔 일가족 6명이 여행을 할 때도 렌터카 하나만 빌려서 다녔다"고 회고한다.
이 당선자는 95년, 98년에 이은 세번째 도전 끝에 서울시장직에 올랐다. 그가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던 청계천 복원 사업은 모험처럼 비쳤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은 사고위험에 노출된 애물단지였지만 교통대란 우려로 철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김민석 후보는 "청계천을 복원하면 교통대란, 쓰레기대란, 상인대란이 일어난다"며 맹공을 퍼부었고, 복원계획이 발표된 뒤에는 실제로 청계천 노점상들이 치열하게 반대시위를 펼쳤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그의 리더십은 이 때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 당선자는 상인전담팀을 만들어 2002년 7월부터 2003년 6월까지 4,200번도 넘게 노점상들과 만나 결국 협조를 얻어냈다.
도시를 어둠침침하게 하던 교각이 철거되고 그 위로 옛 물길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서울시민 사이에 '청계천 신드롬'이 일었다. 그는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단숨에 유력 대선 후보 대열에 합류했다.
그 이후로도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 조성 사업을 잇따라 성공시키는 등 이 후보는 서울시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리고 지금 그는 10년만의 정권교체로 대전환이 예고되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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