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 밝았다. 유난히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던 선거여서 짜증이 날 만도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투표소로 가자. 가서 앞으로 5년 간 이 나라와 국민을 이끌어 갈 후보와 정파를 고르자. 국민의 고통이 무엇이고, 희망이 무엇인지를 표로 말하자.
그런 한 표 한 표가 모여들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이 나라를 밝은 내일로 밀어 나갈 힘이 된다. 주권자의 진정한 힘을 똑똑히 보여주자.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현실정치의 속성 상 자칫하면 권력의 꿀맛에 취해 게을러지고, 타락하고,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쉬운 정치지도자에게 던지는 심판의 칼이다.
부지런하고, 깨끗하고, 지혜로운 지도자에게 보내는 격려와 찬사이기도 하다.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경험한 뒤, 일종의 '제도피로'를 드러내기 시작한 나라도 있고, 민주주의가 국민의 정치적 권리와 자유만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군사독재에 짓눌렸다가 민주주의를 되찾은 지 겨우 20년인 이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에 목이 마르고, 국민의 뜻을 표로 밝히는 선거 가운데서도 으뜸인 대통령 선거는 여전히 빛나는 꽃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극심한 네거티브 공세가 기승을 부렸다. 상대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난에 매달리다 보니 정책과 비전 대결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지나치게 형식적 평등에 치중한 TV토론회마저 상호비난전의 무대였을 뿐 주요 후보들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기회가 되지 못했다. 유권자의 귀에는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는 말만 맴돌 지경이다.
■ 민주주의는 표로 말하는 것
더욱이 각 정당의 후보경선 단계에서 드러난 주요 후보들의 지지도 격차에 거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박 대 반(反) 이명박'의 싸움이 거듭됐다.
어지러운 선거 분위기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싱거운 판세가 유권자들의 선거 관심을 식힌 것도 사실이다. 이번 대선 투표율이 사상 최저였던 5년 전 16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70.8%를 크게 밑돌 것이라는 관측이 잇따른 것도 이 때문이다.
체질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이번에는 마땅히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어서 투표소에 가지 않으려는 유권자도 있다. 기권 또한 민주주의가 보장한 정치적 자유와 권리의 실현 방법이자 정치적 의사표시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제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담화문에서 "최선의 후보가 없다면 차선의 후보에게라도 표를 던지라"고 촉구했듯,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후보, 그것도 아니라면 차악의 후보라도 고를 수 있다.
선거가 단순히 승패를 가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최종 지지율은 승리한 후보가 내세운 주요 공약에 대한 국민투표의 성격도 띤다는 점에서 기권보다는 투표 참여가 한결 유권자의 뜻을 잘 드러낸다.
■ 분열과 갈등 가라앉혀야
이번 대선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예고한 선거도 드물다. 일찌감치 대선 이후를 걱정하는 소리가 그만큼 많았다. BBK 특검법안을 놓고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대착오적 난투극을 벌인 것만으로도 커지는 우려다.
어제까지의 지지율 추이대로 한나라당 이 후보가 승리한다면 대통령 당선자가 특검 수사반의 조사를 받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특검의 수사과정과 결과 발표를 싸고도 지난번 검찰의 BBK 수사 때와 마찬가지로 정파 간의 대립과 갈등이 뜨거워질 게 뻔하다.
이보다 더한 우려는 이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결코 당선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대대적 퇴진운동에 나서겠다는 시민ㆍ사회단체와, 정반대의 대항운동을 다짐한 또 다른 시민ㆍ사회단체의 움직임에서 비롯한다. 이들의 다짐대로라면 이번 대선은 민주주의의 꽃이기는커녕 국가적 불행의 불씨가 된다.
대선 결과는 국민의 뜻이다. 주권자의 뜻을 무슨 근거로 거부하고 길거리에 나서겠다는 것인가. 자연법적 권리인 '저항권'조차 어떤 합법적 수단도 없을 때 부당하고 폭압적인 권력에 대한 최후의 항거 수단으로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일반적 형사사법 절차가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먹과 아우성으로 힘을 과시하려 한다면 그것은 시민ㆍ사회단체가 아니라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어떤 행위도 마다 않는 조직폭력배의 행태다.
오늘 투표를 마지막으로 후보들에 대한 호감과 반감을 모두 접자. 특검의 활동을 차분히 지켜보고,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투표소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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