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캠프만 환호작약이고 다른 모든 정치세력은 상혼낙담이다. 집권의 길이 아득함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민주노동당은 뒤쪽에 속할 테다. 그러나 낙담은 사치다. 시간이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18대 총선은 넉 달도 남지 않았다. 시간은 이번 대선에서 패배한 모든 정치세력에게 넉넉지 않지만, 민주노동당에겐 특히 그렇다.
다른 정치세력들은 꽤 두툼한 전통적 지지층이 있어서 내년 4월 총선에서 쓴맛을 본다 해도 이내 세력을 복원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지지층이 가녀린 민주노동당은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의석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원내외를 넘나드는 경계정당으로 남거나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
■ 통일 근본주의와의 결별을
이합집산이 상례인 보수정치권에서야 정당 하나가 몰락하는 것이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진보정치 사상 처음으로 8년 역사를 이끌어온 민주노동당의 몰락은 진보정치 전체의 영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시장독재의 만개다. 낙담할 여유가 없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민주노동당은 보수정파나 중도자유주의 정파에 견주어서는 분열상을 덜 드러냈다. 적어도 당원들이나 핵심 지지자들의 이반이 또렷한 흐름을 이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완고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동거는 이 정당의 역사 내내 그랬듯 이번 대선 경선 과정에서도 삐걱 소리를 냈고, 당내 자주파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후보가 된 권영길씨는 민족주의 수사와 북핵에 대한 모호한 태도로 당내 후원세력을 만족시켰다.
그리고 그 사실이, 당 밖의 적잖은 진보 유권자들로 하여금 이 정당과의 유대를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바뀌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은 내년 4월 이후 그저 무책임한 직업적 비순응주의자들의 동호회가 되거나 둘로 쪼개질지 모른다. 민주노동당은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우선 당 안팎에서 지적해왔듯, 민주노동당은 민족통일이라는 의제를 제 가치목록의 변두리로 밀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정분을 공식적으로 끊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기반은 이웃나라 정권이나 인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노동계급과 농민, 사회경제적 문화적 약자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것은 북한이 지금과 같은 시대착오적 가산국가(家産國家)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민족지상주의와 통일근본주의는 좌파정당 민주노동당의 근본가치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이 적어도 역사의 지금 단계에선 반동적이고 복고적인 가치, 다시 말해 극단적으로 우익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낭만적 민족지상주의에 이끌리는 통일 담론은 수많은 사회경제 문제들을 '관념 속의 핏줄'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우익적이다. 더 나아가 역사 상의 어떤 민족주의가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다 해도, 민족의 이익이나 재결합 같은 가치는 복지나 사회연대나 인권 같은 가치가 보편가치인 것과 달리 본디부터 특수가치다.
다음으로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사회의 내용과 그 프로그램을 지금보다 더 또렷이 보여주어야 한다.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식 사회민주주의의 속살만이 아니라 그 테두리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 정당이 추구하는 평등과 복지의 한계는 어디인지, 비정규 노동자와 대기업 조직노동자의 서로 엇갈리는 이해관계는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다양한 수준의 문화적 소수자인권이나 환경 의제는 이 정당의 가치목록에서 어디쯤 자리잡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 어떤 사회주의인지 또렷이
이것들을 또렷이 하는 것은 북한문제와 더불어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진보'를 자임하는 한국사회당과 어떻게 다르고 닮았는지를 유권자들에게 설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의 상대적으로 긴 역사가 저절로 이 정당을 좌파 정치세력의 주류로 붙박아두는 것은 아니다. 대선 결과를 두고 좌절하거나 안도할 때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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