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뒤 거의 깨지지 않고 지켜진 ‘한국 대선의 법칙’이 있다. 투표일이 임박한 시점에 메가톤급 변수가 나타나 판세를 뒤흔든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명박 후보의 일방적 게임으로 ‘조용하게’ 끝나지 않겠느냐”는 예측을 깨고 ‘이 후보 BBK 동영상 공개’(16일)와 ‘BBK 특검법 국회 통과’(17일)라는 막판 돌출 변수가 등장했다.
과거 사례로 보면 악재로 여겨졌던 변수가 오히려 대선 승리에 기여하는 역설적 경우가 많았다. 1992년 14대 대선 때의 초원복집 사건은 대선을 사흘 앞둔 12월 11일 김기춘 당시 법무부장관 등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부산 초원복집 식당에 모여 민자당 김영삼 후보 지지를 모의했다. 당시 국민당 정주영 후보측이 이들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 내용을 폭로, “다른 후보가 당선되면 부산ㆍ경남 사람들 모두 영도 다리에 빠져 죽자” 같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원색적 발언들이 낱낱이 공개됐다. 명백한 관권 부정선거의 증거였다. 정 후보와 민주당 김대중 후보 진영은 막판 역전의 호재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김영삼 후보는 자신을 “정치 공작의 피해자”로 포장했다. 결국 상황은 김영삼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우리가 남이가” 라며 영남 유권자들이 똘똘 뭉쳐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2002년 16대 대선 하루 전인 12월 18일 밤에는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후보 민주당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고 후보 단일화를 파기하는 폭탄 선언을 했다. 선거운동 마감을 약 1시간 30분 남긴 순간이었다. 노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근소하게 앞서고 있던 판세가 안개 속으로 빠지는 듯 했다. 이 후보는 이 소식을 듣고 서울 동대문 시장 유세를 중단했다. 그러나 정 대표의 갑작스런 변심 역시 노 후보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소식이 전해지자 노 후보 지지자 및 친노 성향 부동층이 강력하게 결집했고, 젊은 층을 투표장으로 이끌어 노 후보에게 승리를 안기는 호재가 된 것이다.
1987년 13대 대선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2시. KAL기 폭파사건 용의자였던 김현희씨가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에 압송됐다. 폭파 사건이 일어난지 약 보름 만이었다. 유권자들의 대북 안보 심리를 자극하는 깜짝 이벤트였다. 선거 당일 조간 신문엔 김씨가 흰색 마스크를 쓴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사진이 깔렸다. 이 때는 역풍이 불 겨를도 없이 “나라 안정을 위해 몰표를 달라”고 호소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무난하게 당선됐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