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5월 리카르도 카르도나(콜롬비아)와의 타이틀 2차 방어전이 실패로 끝나자마자 한국권투위원회는 징계포상위원회를 열어 나에게 2년간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다.
내 나이가 28세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선수생명을 끊은 것과 다름없는 가혹한 조치였다. 당시 권투위원회는 연습을 소홀히 하고 경기 전에 현재 아내인 옥희를 폭행했다는 등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는 넌센스였고 그 이면에는 권투위원회가 인정하지 않는 매니저와 계약을 맺었다는 등의 복싱계 내부 파벌문제 등이 더 크게 자리잡았다.
당시 권투위원회의 조치에 대해 상당수 복싱 관계자들도 분개하는 상황이었다. 나에게 제대로 뒷바라지도 해주지 않던 권투위원회가 팬들이 퍼붓는 질책의 손가락질을 나에게만 돌리려는 술책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에 대한 징계 발상은 야구 심판이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한 것을 볼로 선언했던 실수를 저지른 직후 이를 만회하기위해 다음 볼이 분명 볼인 줄 알면서도 스트라이크를 외쳐 두 번씩이나 잘못을 범하는 것과 같다는 그럴듯한 언론 보도가 있을 정도였다.
불과 5개월전 내가 카라스키야를 꺾고 챔피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공항에서 마치 권투위원회가 개선한 것처럼 환영식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쓴웃음이 절로 났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4전5기 신화로 유명한 카라스키야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권투위원회 책임자가 이런 말을 한 것도 기억 난다. "카라스키야한테 지겠지만 잘 싸우고 오시오"라고. 이게 어디 할말인가. 이기러 가는 선수에게 질 거지만 잘 싸우라는 게 무슨 말인가. 홍수환이라는 인간이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열심히 싸워서 국위를 선양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시 권투위원회는 선수를 돕고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선수가 나오면 별별 엉뚱한 이유로 모함과 음해를 일삼았다. 나도 그런 소문에 대해 100% 떳떳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소문처럼 지저분하게 생활하지 않았다고 맹세한다. 사생활이 아주 복잡한 것처럼 소문났지만 두 여자 사이를 오간 것 밖에 없다.
2년간 사실상 글러브를 벗었던 나는 1980년 친구인 염동균과 공식 은퇴경기를 했지만 사실상 카르도나 전이 내 복싱의 은퇴 무대나 다름없었다. 결국 한국 권투계에서 내가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고 영웅의 추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4년 남아공 적지에서 아널드 테일러를 꺾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에 이어 3년 뒤 카라스키야를 꺾고 '4전5기' 신화를 썼던 홍수환은 그렇게 사라졌다. 현역에서 은퇴한지 오래지만 아직도 나 자신이 복싱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잡다한 사건들로 골치를 앓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동 외적인 문제였다. 선수생활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한 적은 있어도 진실로 복싱이라는 스포츠 자체에 회의를 느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링에서의 화려함 만큼이나 스캔들과 이러저러한 시비로 내 인생의 항로에서 장애도 컸다.
'시간은 백스텝이 없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말이다. 한창 운동하던 그 시절에야 내가 이런 말을 가슴에 담고 있었을 리 없겠지만, 그 말을 염두에 둔 사람처럼 미래를 향하여 연습하고 땀 흘린 것은 사실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비축하여 전력을 다해 경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쉽게 흐트러지기 일쑤고 주변의 여러 상황이 일에만 집중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료와의 경쟁, 당면한 문제, 생활환경, 부부싸움, 심지어 날짜까지도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여 집중 할 수 없게 된다.
권투위원회의 징계이후 나의 파란만장한 '제2의 삶'이 시작된다. 알래스카로 이민을 갔고, 택시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 마약 운반책 누명과 LA에서 신발장사 등 갖은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귀국 후 방송해설과 강사 등으로 또 한번 변신을 꾀하게 된다. 다음 회부터는 애환으로 얼룩지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 사생활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