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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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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 리뷰

입력
2007.12.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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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백건우에게, 고독한 사람이 고독한 사람에게 내미는 손길을 맞잡으면서 연주회는 시작됐다.

12월, 겨울철의 냉기는 사라지고 가슴(베토벤의)에서 가슴(연주자의)으로, 그리고 또다시 뭇 사람들(청중)의 가슴으로 전해지는 음악의 열기로 연주회장은 훈훈해졌다.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소나타의 전곡 연주회, 7일간에 걸친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7일 동안 예술의전당은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내 가슴을 가득 채운 것은 그 소리 너머의 정적, 침묵의 소리에서 유발된 무한한 여운의 파문이었다.

작곡가와 연주자의 깊은 공감을 통해서만 가능한, 그리고 그 마주침이 청중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 파문을 일으키면서 밀려드는 연주회였다.

베토벤이 마지막 현악4중주 악보에 남긴 메모처럼,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는 답을 얻기까지 백건우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라고 자문해왔을까.

오직 봉우리에만 눈길을 두고 산에 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열정(23번), 발트슈타인(21번), 함머클라비어(29번), 그리고 마지막 3부작 등의 준봉에 오르기 위해 나머지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과정으로 여기는 피아니스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건우의 연주는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늘진 계곡에도 얼마나 많은 것이 숨어 숨쉬고 있는가를 안다. 백건우의 연주는 그늘진 계곡에서도 아름다웠다.

소나타 10번의 안단테 악장은 사랑으로 충만한 동화의 세계가 봄 햇살처럼 따스한 입김으로 다가오는 연주였다. 13번의 도처에는 환한 빛이 그렇듯 무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빛에 충만한 소리 하나 하나가 긴 여운을 머금고 있었다. 뼈저린 고독과 갈등, 짙은 고뇌와 좌절, 침잠과 솟아오름, 드높이 날아 오르는 열락의 춤, 모든 것이 스러져버린 빛의 환함, 정적과 그 여운 등 갖가지 표정이 이토록 깊게 새겨진 연주를 언제 어디서 들을 수 있으랴.

발트슈타인의 격동, 그것은 건반을 두드려 울려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안으로부터 들끓어 오른 용출이었다. 그리고 그 휘황한 용출에서조차 백건우는 무엇인가를 억누르고 있었고, 그러기에 그 용출은 더욱 눈부셨다. ‘무릇 모든 아름다움은 두려움의 시작’이라고 릴케는 노래한다. 백건우는 그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떨림의 파장 하나 하나에서 아름다움이 꽃피어났다.

연주회의 마지막날, 30번의 마지막 안단테 악장이 울리는 순간, 그 동안 억눌러 왔던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 변주곡의 숨결은 마지막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 아리에타로 이어졌다.

백건우는 이 대장정의 마지막 악장을 시작하기 전 한참동안 마음을 추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질풍노도의 소용돌이를 꿰뚫고 마침내 잔잔하게 파동치는 해안, 빛이 서린 아르카디아(이상향)에 이른다.

그 환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나서 백건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깊은 감회에 젖어 있었다. 청중도 조급한 갈채를 보내는 대신 그 정적의 순간을 조금 더 음미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밖에는 막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번잡한 도시의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시골길에 접어 들었을 때 눈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다. 밤의 정적을 가득 채우면서 내리는 눈, 그리고 그 눈 속에 충만한 아리에타의 여운, 그것은 참으로 환한 빛이었다.

이순열 음악평론가ㆍ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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