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이 화두였던 시절, 일부 평론가들은 섣불리 ‘회화의 죽음’을 선언했더랬다.
죽은 줄만 알았던 컨템퍼러리 회화가 멀쩡히 살아서 활개를 치는 꼴을 보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아무튼, 오늘의 회화는 복잡다단한 재조합의 과정을 거쳐 여전히 중요한 실험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 일례가 데이나 슈츠(31)의 그림이다.
데이나 슈츠는 2002년 뉴욕의 자크포이어갤러리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 ‘관찰을 통한 프랭크’로 스타덤에 올랐고, ‘화가들이 좋아하는 화가’라는 호평까지 받았다. 득의작인 ‘관찰을 통한 프랭크’ 연작은 “지구에 프랭크라는 백인 남자 한 명만 남았을 경우”라는 가설에서 출발하는 기이한 회화 실험이다.
화가는 마지막 생존자인 프랭크(머저리처럼 생겼다)가 인류의 멸절이라는 암울한 상황을 마주한 채 폐허 속에서 원시적 삶을 연명해나가는 모습을 덤덤하게 그렸다.
하지만 영화처럼 일관된 이야기로 이어지는 서사적 회화는 아니다. 대신 엉뚱한 작가는 본원적인 질문들을 제기해 주제로 삼는다. “프랭크가 유일한 관객이라면, 나의 그림은 여전히 예술일까?”, “나의 그림을 통해서만 자아를 반추할 수 있는 프랭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 문화란 무엇일까?”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너무 진지해서 적잖은 관객들이 실소를 터트린다. (한창 미술시장이 활황세를 맞았던 상황에서 볼 때, 이런 질문은 뜬금없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런 웃음은, 결국 인류가 언젠가 마주할 ‘최후의 상황’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이런 간단한 시도가, 초상화의 형식을 통해 ‘최후의 인간 프랭크’라는 문제적 인물의 캐릭터를 연구하고, 다시 초상화의 당대적/근미래적 기능을 되묻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놀랍다. 많은 예술 애호가들이 떠들었다: “왜 여태껏 다른 화가들은 이런 흥미로운 게임을 펼치지 못했을까?”
그런데, 작가의 판타지 속에서 세상은 망해도 작가 자신만은 살아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몹시 웃기는 점이다. 화가가 구사하는 시각적 스타일은 이런 블랙 코미디에서 아주 필수적인 요소다.
일견 표현주의나 신표현주의 같지만, 과거 지향적이거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바는 없고, 물감의 두께를 달리 해가며 화면을 질주하는 붓질이 아주 관능적이고 리드미컬해 매력적이다.
문제는 이런 거친 스타일 때문에 종종 ‘배드 페인팅’, ‘아웃사이더 아트’ 혹은 ‘포크 아트’로 분류된다는 것. 작가는 ‘포크 아트’라는 명명이나 “만화처럼 보인다”는 평가엔 펄쩍 뛴다.
그는 분명히 정규 교육을 받은 엘리트 작가다.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시 인근의 서버비아에서 성장한 데이나 슈츠는, 클리블랜드미술학교와 콜럼비아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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