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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새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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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새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

입력
2007.12.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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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49) 시인의 시집을 넘기는 일은 감각의 베일을 한 겹 한 겹 들추는 일이다. 그 감각은 화려하기보단 투명하고, 신경을 저리게 하기보단 아련한 느낌을 선사한다. 황씨의 여섯번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 (문학과지성사 발행)도 다르지 않다. <자명한 산책> (2003) 이후 4년만에 묶은 57편의 시편엔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를 무색케 하는 경쾌함이 천연하다.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졸린데 꾹 참고 일어나곤 하는 걸까, 아니면 늘 나만큼 졸립지 않은 걸까”라고 자서(自序)를 붙인 이번 시집에선 종종 잠 묻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시인의 발랄한 감각은 대체로 나른함을 기분좋게 물리친다.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낮잠 시간. ‘어떤 사람이 공연히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막 향기가 난다, 향기가/ 사람이기를 멈춘 내가 장미꽃처럼 피어난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낮잠은 혼곤함이 깃들 새 없이 ‘영혼에 이빨이 돋는’ 시간이다(이상 ‘낮잠’). ‘끝없이 구불거리고 덜컹거리는/ 산도(産道)를 따라/ 구불텅구불텅/ 덜컹덜컹/ 미끄러지’는 이국의 야간열차에서 선잠이 걷히면서 ‘나는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급기야 ‘탱탱해졌다/ 오줌으로 가득 찬/ 방광처럼.’(이상 ‘파두-리스본행 야간열차’)

이 탄력 넘치는 이미지는 황씨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고양이를 만나 만개한다. ‘너는 잠깐 멈춰/ 내 쪽을 흘깃 보았지/ 잠깐 비척거리는 듯도 보였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오, 그러나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양이의 몸이여/ 마저 사뿐히 직선을 긋고/ 담장이 꺾이는 곳에서/ 너는 순식간 소실됐지’(‘란아, 내 고양이였던’) 1984년 등단작부터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고 염원했던 시인의 선망은 새 시집에서도 변함없다. 허나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내가 흘깃도 보이지 않는 듯/ 그러나 손을 뻗자/ 송사리처럼 재빨리 달아나’ 버리는 새끼고양이는 이 시편의 제목처럼 ‘그 참 견고한 외계’다. 닿을 수 없어 애달픈, 저 너머의 감각이다.

삶도 그러할진대 시인의 감각이 이 ‘견고한 외계’ 앞에 늘 발랄할 수만은 없다. 시인은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라고 읊조리기도, 리스본의 한 카페에서 파두(포르투갈 전통음악)를 들으며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 거듭거듭 노래했다/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는 듯했다’(파두-Dear Johnny)고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태의 순간을 ‘텀벙!/ 우물물이 묵직하게 우므러든다/ 두레박에 쓸려든 다른 우물물이/ 함께 끌려 올라온다/ 다시 텀벙!/ 또 텀벙!’(‘권태’) 물장구치며 흩어버리는 그 천진함이란!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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