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 이명박’의 기묘한 싸움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지지율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도 선거 막판까지 전방위적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극복하고 당선되기까지 그의 여정은 무척 지난하고 고달팠다.
출발은 산뜻했다. 8월 20일 한나라당 경선 후 이 후보의 지지율은 60%에 육박했다. 경선 막판까지 부동산 차명 보유 의혹 등에 대해 맹공을 퍼붓던 박근혜 전 대표가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에 ‘이명박 대세론’은 더욱 탄력을 받는 듯 했다.
문제는 내부에서 불거졌다. 경선 혈투를 거치면서 생긴 감정의 상처는 깊었고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 일부 측근들이 경솔한 발언으로 박 전 대표 측을 자극하면서 생채기는 점차 고름으로 번졌다. 후속 당직 인사에서 박 전 대표 측이 대거 배제되면서 “우리더러 당을 나가라는 말이냐”며 불만이 폭발했고 박 전 대표마저 “오만의 극치”라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당이 당장 깨질 듯한 냉랭한 분위기가 두 달여 지속됐다. 이 후보가 늘 외치던 포용과 화합은 잡힐 듯 사라지는 신기루마냥 멀게만 보였고, “이 후보와 측근들이 높은 지지율에 도취돼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11월 7일‘불안한 후보로는 안된다’며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전 총재의 등장은 결정타였다. 보^보 대결이 벌어지며 보수진영은 폭탄을 맞은 듯표심이 요동쳤다. 이 전 총재가 출마 즉시 20%대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대세론에 구멍이 뚫렸다. 캐스팅보트를 쥔 박 전 대표는 침묵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이 당선자가 자신의 빌딩관리회사에 자녀들을 위장 취업시켰다는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이 당선자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때이 당선자는 한껏 몸을 낮추며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이 당선자는“박근혜 전 대표는 정권 동반자”라고 선언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얼었던 박 전 대표의 마음도 풀리기 시작했다. 위장 취업에 대해서도 즉각 사과하며 논란을 조기에 진화했다.
하지만 이회창 돌풍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부 조사에서 이명박 당선자의 지지율이 30%대 후반으로 떨어지면서“마지노 선인 35% 지지율마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심리적인 압박감이 고조됐다.
설상가상으로 대선의 마지막 뇌관으로 불리던 BBK 사건의 핵심 인물 김경준씨가 대선을 불과 한달여 앞둔 지난달 16일 국내로 송환되면서 대선 정국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 후보 측에는“한방에 전세가 뒤집히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박 전대표도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 당선자는“내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 당선 이후라도 대통령 직을 걸겠다”며 수사에 당당하게 대응했다. 이에 호응하듯 박 전대표가 오랜 침묵을 깨고 지난달 30일 전남무안을 시작으로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상황은 서서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결국 검찰 수사 발표로 이 당선자에 관한 의혹이 해소되자 지지율은 다시 오름세로 돌아섰다. 이 당선자는 이어“모든 것을 버리겠다”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재산을 헌납하겠다고 약속하는 파격을 보였다.
투표 전 마지막 일주일 동안 상대 후보들의 공세는 극에 달했다. 당선 후에도 이 당선자에게 족쇄가 될 수 있는 BBK 특검법이 발의되는가 하면 투표를 사흘 앞두고 이 당선자의 BBK 설립 발언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되는 악재가 겹쳤다. 모든 대선 후보들은‘반(反) 이명박’ 전선을 구축해 후보사퇴를 촉구했고 청와대마저 검찰에 수사 재지시를 요구하며 이 당선자를 압박해왔다. 그러나 더 이상 이변은 없었다. 이 당선자는 특검법을 전격수용하는 대승적 결단으로 분위기를 또 한번 반전시키며 위기를 넘겼다. 역전을 노리는 상대 후보들의 지리한 공세가 투표 전날까지 계속됐지만 이미 이 당선자에게 기울어진 표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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