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대학시절 친한 후배가 있었다. 학교 앞 술집에서 그저 그런 통닭과 생맥주를 시켜놓고 ‘인생은 이런 것이다’ ‘사회운동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둥 선배랍시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썰’을 풀어놓던 중, 후배가 눈물을 뚝뚝 떨군다. ‘자식, 내 말이 감동적이었던 게로군’, 만족감에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입을 여는 후배. “제 아버지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이웃집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밖에 나갔는데, 큰길에 아버지께서 누런 통닭 봉지를 꼭 안은 채로쓰러져 계시더라구요.” 나도 후배도,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장면2
토요일 저녁, 추운 방 안에서 이불을 둘러쓴 채 로또 추첨방송을 보던 가족은 할 말을 잊었다. “1등이다, 20억…”. 모두 멍한 상태. 소리도 지를 수 없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일가족은 모두 벙어리가 됐다. 이윽고 재잘거리기 좋아하는 다섯살 난 딸이 방 안을 온통 채운 침묵을 깼다. “아빠, 우리 통닭 배불리 먹을 수 있어요?” 그날 네 식구는 식구 수대로 통닭을 시켜 먹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양념통닭, 아빠가 좋아하는 생맥주와 후라이드, 엄마는 닭다리 만으로 한 상자를 채운 닭봉치킨을 시켰다. 아들은 엄마가 닭다리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평소 같았으면 “난 목 부분이 제일 맛있어”라며 아들과 딸에게 다리를 주셨을 텐데. 그날 저녁 엄마 앞에는 칼로 살을 발라낸 듯 깨끗한 닭다리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소리없이 쌓이는 눈을 밟으며 추위에 식을세라 아버지께서 보물인 양 품고 오신 통닭. 냄새 때문에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따가운 눈총도 받으셨겠지요.
당신은 “자 통닭 먹자”라며 따뜻한 치킨을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통닭을 앞에 놓고 한 자리에 둘러앉아 재잘거리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웃음을 지으셨던 것 같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한 입 베어 문 닭다리. 바삭바삭한 껍질과 함께 혀 끝에 전해오는 부드러운 속살의 맛이라니. 어린 시절 세상 최고의 음식은 단연 통닭이지 않았을까요.
아마 이맘때였을 것입니다. 연일 이어지는 송년회 때문에 더욱 까칠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던 그 시절. 술안주로 드시던 통닭을 들여다보다 잠든 자식놈 모습이 눈에 밟혀, 택시비를 아껴 품에 안고 돌아왔던 닭튀김은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선물해준 사랑이었죠. 그 사랑을 떠올리게 해주는 통닭 얘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손만 내밀면 먹을 것이 널린 요즘, 전화 한 통과 만원짜리 한 장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닭을 배달시켜서 먹을 수 있습니다. 매콤한 양념부터 짭짤한 간장양념, 화끈한 불닭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트랜스지방이다 뭐다 해서 요즘은 값싼 쇼트닝유로 튀기는 통닭은 자취를 감췄다죠? 사실 쇼트닝유로 튀긴 닭이 훨씬 고소하고, 바삭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포도씨 기름으로 튀기거나 오븐에 구워 기름을 쪽 뺀 통닭이 사랑을 받는답니다.
게다가 요즘은 통닭도 기능성이랍니다. 육질을 부드럽게 하고 부족한 비타민을 강화한 ‘비타민 치킨’, 닭 사료로 DHA 사료를 먹인 ‘DHA 치킨’, 각종 한약재를 넣어 숙성시킨 ‘한방 치킨’ 등 종류도 많죠. DHA 치킨 같은 경우 뇌세포 활성화 물질이 들어있어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이고 시력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고 업체들은 선전합니다.
통닭 요리의 진화도 눈부십니다. 빵 대신 각종 채소와 닭고기를 섞은 치킨 케이크, 어디서나 가볍게 먹을 수 있도록 종이컵에 담은 팝콘 치킨, 피자 소스와 치즈를 넣은 피자치킨 등 퓨전 닭요리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습니다. 하여튼 ‘내일은 어떤 통닭이 나올까’를 기대할 정도로 프리미엄 통닭들의 고공행진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통닭이 다이어트의 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네요. ‘한 입만 먹어야지’라던 다짐은 그 한 입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고소한 맛에 제 자리를 떠났던 정신이 되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앞에는 닭뼈가 수북하게 쌓이기 일쑤니까요.
통닭은 가공할 열량을 가진 친구입니다. 옷만 입혀 튀긴 후라이드가 1마리에 1,664kcal, 매콤한 양념을 묻히면 2,037kcal나 된다니 어른 1명에게 하루 필요한 열량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죠.
1kcal가 물 1리터의 온도를 14.5도에서 15.5도로 올리는 데 소모되는 열량이니까, 통닭 한 마리면 차가운 물 한 주전자를 끓이고도 남을 에너지랍니다.
생각만 해도 허기를 자극하는 통닭은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걸까요. 그 뿌리가 궁금합니다. 1980년대 초 서구식 통닭을 한국에 소개한 김문수 하산푸드시스템 회장은 “가마솥 같은 큰 기름솥이나 군대에서 사용하던 야전 소독용 기계에 튀겨내던 것이 1970년대 치킨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튀김옷이라고 해봤자 밀가루가 고작이었으니 맛은 심심煞憫? 김 회장은 1980년 미국에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접하고는 그 맛에 매료돼 제대로 된 압력식 튀김기계와 닭에 밑간을 하는 염지제, 더욱 바삭한 맛을 내는 파우더를 수입하게 됐답니다. 그때까지 닭 요리라고는 삼계탕, 백숙, 닭볶음탕이 고작이던 한국에 서구식 통닭이 들어온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어치우는 통닭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대한양계협회의 말을 빌면, 한 해 한국에서 소모되는 닭은 1인당 8kg이랍니다.
한 사람이 1년에 8마리 정도를 먹는 셈이죠. 초복 중복 말복에 삼계탕을 꼬박 챙겨 먹었다고 해도 나머지 5마리는 굽거나 튀긴 통닭의 형태로 소비된 겁니다. 한 번에 먹는 양이 반 마리 정도니까 1년에 10번, 대략 한 달에 1번은 통닭을 드셨군요.
닭 얘기를 하다 보니 통닭에 맥주 한 잔 생각이 간절합니다. 오늘 평균 소비량 8마리 중 1마리를 소비하렵니다. 퇴근길에 통닭 한 마리 사 들고 집에 간다면 온 가족이 행복하겠죠. 아이들과 둘러앉아 통닭에 얽힌 기억들을 전해주고 싶네요.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연말이 통닭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지 않나요?
■ 남궁연
나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여기서 전성기라 함은 부모님에게 100% 의지하고 고뇌와 번민이 없던 시절을 말합니다. 신촌로터리에 그야말로 당시 최고로 ‘럭셔리’한 가족의 외식 보금자리가 있었으니, 바로 ‘영양센타’.
닭을 여러 마리 꼬치에 꽂아 빙빙 돌리면서 그 모습을 유리창 밖으로 보이게 해 지나가는 행인들의 군침을 꿀꺽 삼키게 했던 곳. 기름은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잘 구워진 닭은 화선지 비슷한 큰 종이에 싸이고, 소금과 후춧가루는 가루약을 담던 종이 포장에 들어가고, 무는 비닐봉지에 담긴 뒤 실로 주둥이가 묶이면 완성! 온 가족이 버스를 기다리며 닭이 식지 않기를 바라면서 집까지 달려왔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때 부모님은 우리에게 닭 날개를 먹지 못하게 하셨어요. 남자들은 날개 먹으면 커서 바람 피우기 때문에 안 된다면서 말이죠. 켄터키 할아버지의 밀가루에 범벅이 된 닭이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양센타의 통닭.
지금도 가끔 길거리, 개조된 화물차 뒤에서 꼬치에 끼워져 돌아가고 있는 통닭을 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통닭은 ‘패스트 푸드(fast food)’가 아니라 우리에게 추억을 공유하게 하는 영원한 ‘추억의 음식(past-food)’인 셈이네요.
■ 박진영
미국 진출을 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한 게 있었죠. 고기를 끊자. 고기를 끊어서 나를 철저히 관리하며 반드시 미국에서 성공해보겠다는 내 의지의 표현이었어요. 그렇게 살기를 5년여, 아직도 고기를 끊겠다는 다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내 의지가 사정없이 흔들릴 때가 있어요. 바로 통닭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름이 좌르르 흐르면서 느끼하지 않고 매콤하게 혀를 자극하는 통닭은 내게 최고의 육류 음식이었죠. 거기에 김치나 단무지를 곁들여 먹는 맛이란! 미국 생활을 할 때 다른 음식은 그립지 않아도 통닭 만큼은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흑인 뮤지션들을 만나보니 그들도 미국식 통닭, 치킨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들은 마치 우리가 삼겹살 먹듯 갖가지 종류의 치킨을 먹었고, 거기에 수박을 곁들여 먹곤 했어요. 그 모습을 보니 어찌나 통닭이 먹고 싶어지던지. 정말 치킨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걸 꾹 눌러 참았습니다. 이 말을 하고 보니 또 통닭이 먹고 싶어지네요. 쩝쩝.
허정헌기자 xscope@hk.co.kr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 후라이드·양념·찜닭·불닭… 닭 요리가 변하네
닭. 튀기거나 굽거나 삶거나 찌거나 볶아서 한국인이 섭취하는 닭은 하루 평균 180만 마리. 지금이야 컵에 담아 먹고, 샐러드에 버무려 먹고, 연기에 그슬려 먹고 다양하지만, 반백년 전만해도 푹 고아 먹는 것이 유일한 요리법이었다. 격동의 반세기, 한국인의 닭 요리는 어떻게 변해 왔을까?
▦1960년대 닭공장에서 닭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숨겨진 총아 육계(肉鷄)의 등장. 귀한 손이나 와야 구경할 수 있었던 닭요리가 수시로 밥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먹을 기회가 잦아지자 자연 먹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인삼 황기 넣고 삶은 탕에 물린 아버지들은, 귀가길에 장작이나 전기로 구운 닭을 손에 들고 오셨다. ‘치킨’이란 말은, 아직 미군 기지촌에서나 쓰던 말이었다.
▦1970년대 흑백TV 속의 경쾌한 CM송과 함께, 식용유가 전국에 보급됐다. 궁중에서나 쓰던 튀김 요리법이 대중의 입맛을 당겼다. 닭이 ‘후라이드 치킨’으로 불리기 시작한 무렵이다. 시장 모퉁이엔 느끼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닭집’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70년대 후반이 되자 똑같은 간판을 내건 프랜차이즈 치킨점이 동네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10년 동안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이 5배로 뛰었다. 복덩방 주산학원과 함께 골목마다 빠지지 않고 있던 것이 통닭집. 시대를 주름잡은 것은 매콤달콤한 소스에 버무린 양념통닭이었다. 소스의 맛은 달라졌어도 양념을 입힌 치킨은 오늘날까지 가장 보편적인 닭요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90년대 ‘기름에 튀긴다’는 통닭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야채 떡 고구마와 함께 철판에 볶는 춘천닭갈비, 스파이시한 맛을 내세운 브랜드 치킨 등이 입맛을 흔들어 놓았다. 간장을 넣고 바특하게 졸이는 경상도식 찜닭도 인기를 끌었다. 기업화된 대형 프랜차이즈의 경쟁 속에, 커다란 솥에서 누렇게 튀겨내는 ‘동네 치킨’은 추억의 맛으로 자취를 감춰 갔다.
▦2000년대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 사람들은 먹는데서도 ‘센’ 자극을 원한다. 혀뿌리를 얼얼하게 만드는 핫소스를 바른 불닭이 등장했다. 남녀노소 여름겨울 가릴 것 없이 눈물을 쏙 빼주는 뜨거운 맛에 열광했다. 간장과 마늘향이 가미된 또다른 경상도식 치킨도 확고한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 요즘은 웰빙 치킨이 대세
만인에게 사랑을 받는 밤참거리, 전화 한 통이면 군부대 막사까지도 찾아온다는 통닭은 손만 내밀면 될 정도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회를 동하게 하는 뛰어난 통닭 맛 한쪽으로는, 가공할 열량과 트랜스지방에 대한 걱정을 떨쳐낼 도리가 없다.
특히 트랜스지방은 심장질환과 동맥경화 등을 일으키는 주범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뿌린 만큼 거두나니, 먹은 만큼 체중은 늘겠지만 트랜스지방으로 피를 더럽힐 수는 없는 법. 꼼꼼히 따져보고 먹을 일이다.
물론 과거 기름솥에 트랜스지방 덩어리인 쇼트닝을 넣고 불을 뜨겁게 지펴 튀겨내는 통닭에는 피를 걸쭉하게 만드는 트랜스지방이 풍부했더랬다. 그러나 웰빙시대인 요즘 통닭의 트랜스지방에 대한 걱정은 살짝 접어둬도 무방하다.
통닭업계 선두 주자들이 ‘올리브 기름이 좋다’ ‘해바라기 기름이 최고다’라며 핏대를 올려가면서 경쟁한 결과 트랜스지방은 통닭에서 썰물 빠지듯 쪽 빠졌다.
게다가 조리온도를 170도로 유지하고, 기름을 자주 교체해주는 것도 소비자들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것을 어떻게 다 확인하고 먹느냐’고 물어보는 소비자에게는 인지도가 높은 프랜차이즈 통닭을 권하고 싶다.
정기적으로 본사에서 제품의 질 관리를 하고 있다니 좀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키친 타올로 꾹꾹 눌러 기름을 빼는 방법도 좋다. 기름에 튀기지 않고 오븐에 구운 통닭도 있다니 좋은 대안이 되겠다.
그렇다면 다음은 소화다. 밤참 잘 먹고, 다음날 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면 즐거웠던 입이 위장과 대장에게 상당히 미안할 터. 이럴 때는 통닭에 으레 따라오는 하얀 무, 무 초절임을 십분 활용해볼 만하다.
치킨대학 중앙연구소 이승택 과장은 “무 초절임이 언제부터 통닭과 궁합을 이뤘는지 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빚어낸 최상의 궁합”이라고 극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 초절임에 풍부한 각종 유기산은 시원한 느낌을 줘서 통닭의 느끼한 맛을 없애는데도 그만이다.
여기에 무에 들어 있는 디아스타아제라는 효소는 고단백 식품인 통닭을 빨리 소화흡수시켜 위의 부담을 덜어주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밥과 반찬을 골고루 섭취하듯 통닭과 무 초절임을 함께 먹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는 얘기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