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인상적인 프랑스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레옹〉(1994년)이 아닐까 싶다. 살인청부업자와 고아 소녀의 교감을 그린 이 작품으로 장 르노는 일약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 떴다.
그런데 프랑스인(뤽 베송)이 각본ㆍ감독을 맡고, 프랑스 영화사(고몽)가 돈을 대고, 많은 출연진이 프랑스인이지만 스타일은 영 할리우드식이다.
무대도 뉴욕이고, 대사도 영어다. 그러니 프랑스 영화다운 맛은 별로 없다. 프랑스 영화답다는 모호한 개념 자체가 필자 개인의 낡은 기호의 반영이겠지만 미국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이유는 기실 없다는 얘기다.
■하기야 프랑스적인 영화라는 게 프랑스에서도 고사 위기에 몰린 판국이니 왜 할리우드식으로 만드느냐고 따질 계제는 아니겠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든 미국 영화와도 겨룰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관객을 많이 확보한 점을 칭찬해 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불편함의 이유를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정확히 짚었다. 12월 3일자 '프랑스 문화의 죽음'이라는 기사는 프랑스 문화의 영광을 흘러간 노래라고 단언했다. "국제 문화 시장에서 프랑스의 힘이 쇠퇴하고 있다"는 얘기다.
■몰리에르, 위고, 발자크, 플로베르, 프루스트, 사르트르, 카뮈, 말로의 나라, 가장 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한 프랑스에서 지금은 영미 소설이 판을 친다. 클래식 분야도 20세기까지만 해도 드뷔시, 사티, 라벨, 미요 같은 거장을 배출했지만 지금은 전무하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이제 트레네, 아즈나부, 피아프의 시대가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같은 온갖 이즘의 산실이었던 파리 미술계도 뉴욕과 런던에 완전히 밀렸다. 그나마 힘겹게 버티는 게 요리, 포도주, 패션 정도?
■기사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부제로 동원해 지난날의 찬란함을 현재의 썰렁함과 대비해 비꼬고 있다. 잘 모르겠다.
정말 프랑스 문화가 힘과 강점을 상실해서 영미 문화에 밀린 것인지,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핵으로 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와 영어화의 물결이 너무 거세서 세계인들이 차이와 다름과 깊이를 보는 눈이 어두워진 것인지. 또는 그 둘의 결합인지.
그런 한편으로 한국인으로서 맥이 탁 풀린다. 프랑스가 저 지경이라면 이제 겨우 먹고 살 만해진 한국은 문화ㆍ예술에서 세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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