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를 물의 도시라 부르지만 그 곳은 내 상상 속 도시일 뿐이다. 내 기억 속 물의 도시 가운데 으뜸은 암스테르담이다. 개천이나 샛강 너비의 운하들이 실핏줄처럼 시내 곳곳을 휘감고 있었고, 그 물길과 땅길이 병진(竝進)하고 교차하며 네덜란드왕국의 수도를 진정한 물뭍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운하에서 난생 처음 보트 트립이라는 것을 해 봤다. 그것은 또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 해 본 보트 트립이기도 했다. 파리 센강의 유람선은 꽤 두툼한 역사를 자랑하고 한강에도 언젠가부터 유람선들이 떠다니지만, 나는 그 배들을 타보지 못했다. 서울에서든 파리에서든 거기 산다는 느낌이었지 그 도시들에 들렀다는 느낌이 아니어서 그렇게 됐을 것이다. 유람선은 관광객이나 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초행의 암스테르담에서, 나와 ‘유럽의 기자들’ 동료들은 일종의 관광객이었다. 직업훈련의 일환으로 촘촘한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지만, 낯선 곳의 풍물을 구경하는 것이 관광의 정의라면 우리가 관광객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단체로 유람선에 오른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 유람선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아니나다르랴, 청어 요리가 포함돼 있었다. 암스테르담 운하의 유람선에서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에서의 일주일 동안 청어를 지겹도록 먹었다. 그 전에 내가 청어를 먹어본 적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른다. 술안주로라도 청어 과메기를 맛보긴 했을 테지.
그러나 청어를 청어라 의식하며 먹어본 것은 네덜란드에서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 네덜란드 기억은 청어 맛의 기억과 굳게 깍지 끼고 있다. 썩 칭찬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내 입에는 너무 짰다.
로마의 통닭이 그랬듯. 나는 청어를 입에 넣고는 잇대어 빵이나 푸성귀를 한 입 가득 물어 소금기를 눅이곤 했다. 신기하게도, 내 동료들은 그 짠맛에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짜다고 투덜거린 것은 나뿐이었다.
요즘 암스테르담 운하 유람선에선 한국어로도 관광안내를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1992년 10월 우리 ‘유럽의 기자들’이 탄 유람선에선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네 가지 언어로만 안내방송을 했다. 그럭저럭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뿐이었지만, 나는 네 언어 모두에 귀를 곤두세우며 운하 둘레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 애썼다.
나는 암스테르담의 모든 것을 내 눈에 담고 싶었다. 그 때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정이 든 탓에 아름답다 여기는 편애나 낭만적 상상력에 오염된 선입견을 배제하고 무심한 눈으로 살필 때, 암스테르담은 내가 가본 도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도시 두셋 가운데 든다. 나는 파리를 내가 가본 도시 가운데 가장 수려하다 여기지만, 암스테르담에서 몇 달만 살았더라도 파리 대신 암스테르담을 꼽을지 모른다.
■ 렘브란트 그림 아닌 이름으로만 익숙
렘브란트가 살았다는 집을 선창 너머로 바라보며, 그의 그림 가운데 내가 도판으로라도 본 게 뭐가 있을까 떠올려 보았다. 어렴풋한 자화상 몇 개가 끝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것은 렘브란트라는 이름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온 그 이름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나는 렘브란트와 친숙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 실체를 아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유람선에서 내려, 우리는 네덜란드 외무부가 붙여준 가이드를 따라 시내를 관람했다.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암스테르담 유대인 사회의 흔적을 되밟았다. 예순이 다 돼 보였던 여성 가이드도,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유대인 같았다. 암스테르담 유대인 사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마치 제 집안 역사를 들려주듯 열정적이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구역을 살펴보았고, 유대역사박물관을 둘러보았고, 안네 프랑크의 집엘 들렀다. 유대인 구역을 지나면서도 렘브란트의 집에 들르지 않은 걸 보면, 이 짧은 가이드투어는 유대문화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일정에 끼워넣은 것이 분명했다.
나치 치하에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사회는 철저히 바스러졌다. 전쟁 이전까지 암스테르담은 유대인이 이끄는 세계 다이아몬드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전쟁이 끝난 뒤 그 지위를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 물려주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겪은 악몽에 치를 떤 유대인 다이아몬드업자들이 앞 다투어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나는 그녀의 일기를 떠올리려 애썼다. 내가 <안네의 일기> 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막 들어가서였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안네가 은근히 마음을 주었던, 같이 숨어살던 친구 이름이 페터였다는 것, 안네가 받은 생일선물 가운데 요구르트가 있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한 가지는 또렷했다. 요구르트라는 말과 내가 처음 마주친 것이 <안네의 일기> 에서였다는 것. 안네의> 안네의>
■ 안네 프랑크의 집 보고 홀로코스트 생각
추체험 속에서 홀로코스트를 슬퍼하노라면, 두 가지 개운찮음이 그 슬픔을 방해하거나 배가한다. 첫 번째 개운찮음은, 그런 끔찍한 집단폭력을 겪은 이들이 또 다른 집단폭력의 주체가 됐다는 사실에서 새어나온다. 20세기 후반 이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21세기의 이 시점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인종주의의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종 위계의 맨 위에 있다 여기는, 속으로 그리 여길 뿐만 아니라 그런 믿음을 공격적으로 드러내고 실천하는 최악의 인종주의자들이다.
또 하나의 개운찮음은, 가장 끔찍한 비극조차 기꺼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인간의 본성을 지켜봐야 하는 데서 나온다. ‘홀로코스트산업’이라는 말은 이 인류사의 비극을 이용해 치부하는 일부 유대인 장사꾼들을 겨누고 있지만, 그런 교활함과 비윤리성은 인간세상의(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의) 한 작동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홀로코스트산업’은 ‘불행산업’이나 ‘비참산업’의 하위범주에 불과하다. ‘9ㆍ11 산업’도 그 하위범주에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침공은 ‘9ㆍ11 산업’의 시장진입 완료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동류(同類)의 어떤 불행도 어떤 비참도 시장에 내다팔 수 있을 만큼 모질고 비천한 것이 인간이다.
암스테르담의 동료들 틈에서, 나는 데카르트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이 근대 합리주의의 비조는 장년기의 스무 해 이상을 네덜란드에서 살았고, 암스테르담에도 얼마간 머물렀다. 그의 대표작 <방법서설> (1637)이 처음 출간된 것도 네덜란드에서다. 우연이라 말해야겠지만, 20세기 언어학에 데카르트 붐을 만들어낸 촘스키의 출세작 <통사구조론> (1957)도 네덜란드에서 처음 출간됐다. 통사구조론> 방법서설>
촘스키처럼 생전의 데카르트도, 당대 주류사회의 존경과 따돌림을 동시에 받았다. 데카르트가 국왕과 지배계급을 포함한 프랑스인 전체의 갈채를 받은 것은 스톡홀름에서 폐렴으로 죽고 나서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으므로, 이제 그는 위대한 프랑스의 자산이 돼야 했다. 미국 주류사회도, 촘스키가 죽으면, 그를 거리낌 없이 추도할지 모른다. 그 역시 ‘자유사회’ 미국의 자산이 돼야 할 테니.
■ 데카르트, 촘스키처럼 존경·따돌림 함께 받아
‘자유의 고향’ 미국에 살고 있는 촘스키는 주류사회의 따돌림에 겁먹어 굳이 네덜란드로 거처를 옮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17세기의 비순응주의자 데카르트에겐, 교회의 아귀힘이 드센 조국보다는 세속 가치가 더 존중되는 네덜란드가 한결 살기 편했을 것이다. 데카르트 자신도 네덜란드를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관용적인 나라라고 평했다.
매매춘이나 마약 복용에 너그러운 걸 보면, 네덜란드는 지금도 데카르트 시대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 같다.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그 흔한 ‘커피숍’에 들러 마리화나를 피워보지 못했다. 그러나 동료 몇(여자도 끼어있었다)과 어울려 저 유명한 데 발렌 구역의 홍등가를 둘러보긴 했다. 물론, 그저 둘러보았을 뿐이다. 쇼윈도 너머로만.
마지막으로 암스테르담에 간 게 1996년 부활절 무렵이다. 안트베르펜에 머물다 카렌의 차에 실려 당일치기 나들이를 했다. 우리는 싱겔 운하가 보이는 한 맥줏집에서 하이네켄에 대취했다. 술기운에서 벗어나려고 시내를 한 시간쯤 걸었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다.
카렌은 취기 속에서 운전대를 잡았고, 안트베르펜까지 차를 몰았다. 아마도 그 취기 때문에,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 네덜란드 시골에서 한참을 헤맸다. 어차피 헤맨 김에 중간 중간 차를 세워놓고 한 30분씩 눈을 붙이기도 했다. 안트베르펜에 도착했을 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을 떠난 지 좋이 일고여덟 시간은 됐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사고를 안 겪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카렌! 그 때 다시는 음주운전 안 하기로 했지?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