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S대 국문과 4학년 졸업반인 이모(24ㆍ여)씨는 최근 학교에 졸업유예 신청서를 냈다. 이유는 재수강과 논문 연구다. 그러나 졸업학점 130점을 다 채우고 내년 2월 졸업을 코 앞에 둔 이씨가 졸업유예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취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2학기 초만 해도 직장을 못 구해도 제 때 졸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속 취업 시험에 떨어지면서 막막함이 밀려왔다. 이씨는 “그냥 졸업할까도 고민했지만, ‘졸업을 연기해 느긋하게 취업 준비를 하라’는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예비 백수'로 전락한 '예비 졸업생'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못한 대학 4학년생들 사이에 졸업을 미루는 ‘졸업 유예자’들이 늘고 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졸업해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대열에 끼느니, 차라리 ‘대학 5학년’이 돼 학생 신분으로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주요 인터넷 취업 관련 사이트에는 졸업 유예를 고민하는 예비 졸업생들의 글이 하루 평균 5, 6건씩 올라오고 있다. 대학가에서는 취직을 못해 졸업을 미루는 학생들을 일컫는 ‘NG(No Graduation)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청년 취업난은 심각하다. 10월 말 현재 20대 청년 실업률은 6.5%로 전체 실업률(3.3%)의 2배가 넘는다. 20대 청년 실업자 수는 27만6,000명으로 전체 실업자(73만3,000명)의 무려 37.6%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8월과 올 2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27만8,000명 중 취업을 못 한 사람은 7만6,000명(27%)이나 된다.
기업은 졸업 예정자를 좋아해?
취직을 못한 대학 4년생들이 졸업을 미루는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이 졸업자보다 졸업예정자를 선호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울 K대 철학과 4학년 김모(24ㆍ여)씨는 이번 학기에 전공필수 과목 하나를 일부러 안 들어 졸업을 내년 8월로 미뤘다. 그는 “무턱대고 졸업했다가 기업으로부터 ‘무능력한 취업 재수생’이라는 꼬리표만 달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그런 불이익을 당하느니 졸업을 늦춰 졸업 예정자로 취업에 도전하는 게 나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못하면 무능력하거나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는 주위의 부담스러운 시선도 졸업유예를 부추긴다.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김기철(26)씨는 요즘 소화제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 극심한 취업 스트레스에 따른 신경성 소화 장애다. 부모님 얼굴 보기도 두렵다. 졸업을 늦추고 싶지만 9학기 등록금을 달라고 손 벌리기가 죄송스럽다. 그는 “겨울 방학 아르바이트로 9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서라도 졸업을 늦추고 싶다”고 말했다.
"제발 F학점 주세요" 읍소
졸업을 미루기 위해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은 졸업학점을 일부러 채우지 않는 것이다. 경북 소재 대학 4학년 홍지엽(25)씨는 2학기 수강신청을 할 때 일부러 졸업학점에서 1학점이 모자라게 했다. 입사 원서에 함께 제출할 토익(TOEIC) 성적표가 없는 그는 내년에 한 학기 더 다니면서 토익 공부를 할 생각이다. 홍씨는 “내년 2월 졸업하는 한 선배는 교수를 찾아가 ‘이번에 시험 본 회사에서 떨어지면 졸업을 늦춰야 하니 F학점을 달라’고 읍소해 약속을 받아냈는데, 다행히 합격해 예정대로 2월 졸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고용정보원 이기찬 차장은 “기업들의 경력직 위주 채용 관행이 보편화하고, 일부 대기업에서 채용 조건으로 졸업예정자를 못 박는 등 캠퍼스 NG족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졸업 유예를 임시 도피처가 아닌 취업 성공을 위한 자기 계발의 시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박유민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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