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BBK 수사를 총체적으로 불신하는 여권과 일부 시민ㆍ종교단체의 반발이 확산되면서 17대 대통령 선거전의 지형이 갈수록 일그러지고 있다. 대선전의 중심 축이 돼야 할 정책 대결과 정당끼리의 건전한 경쟁은 사라지고, 실체적 진실은 덮어둔 채 정치적 편향에 따라 난타전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대선 판을 깬 장외 투쟁까지 예고, 대선 이후 불복 사태마저 우려되고 있다. BBK 사건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아닌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한 방’을 먹인 형국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범여권과 과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시민ㆍ종교단체는 11일에도 BBK 사건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BBK 사건 수사검사에 대한 탄핵 방침을 거듭 확인했고, 기독교ㆍ불교ㆍ원불교ㆍ천주교 등 4대 종단 소속 일부 종교인들도 13일 저녁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정치검찰ㆍ부패세력 규탄 촛불 기도회’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종교인들은 이날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있는 만큼 대선 후보들은 유세를 취소하고 검찰의 부당함을 규탄하는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촉구했다. 20년 전 이들 종교인이 그랬던 것처럼 장외 투쟁에 다시 나서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러나 BBK 사건이 그 이니셜처럼 대한민국을 ‘바보 코리아’로 만들고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한국 사회를 이끄는 ‘침묵하는 다수’ 사이에서는 대선의 큰 판을 깨지 않는 냉정함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예술원 회원이자 소설가인 작가 이호철씨는 “큰 판을 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이든 시민단체든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나, 대선은 대선대로 잘 치러야 한다”며 “내 자신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 1987년 6월 항쟁의 선두에 섰지만, 거리로 나선다고 무조건 호응을 얻는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했다. 그는 “(검찰 수사에 대한 여권의 반발은) 한국 민주정치를 바라보는 세계의 눈에도 수치스러운 풍경으로 비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략적이고 소모적인 장외 투쟁 대신, 지금이라도 대선의 본류(本流)가 정책 대결로 옮겨져야 한다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BBK 문제는 과소평가할 수 없고 또 명쾌히 해결돼야 하지만, 각 당이 후보 개개인의 인기나 과거에만 집중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정책 대결이 사라지면서 이번 대선은 민주주의와 정당 제도의 의미가 없어지는 판이 돼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전희경 정책실장도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이상, 현 시점에서는 네거티브 공방은 자제해야 한다”며 “각 당은 지금이라도 공약이나 정책 비전 등을 갖고 유권자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기수 한양대 교수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지만 이 후보의 흠결을 드러내는데만 매달리는 여권의 네거티브 전략으로는 스스로의 지지율을 올릴 수 없다”며 정책 대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치권의 행태를 후보자들이 냉정하게 판단, 표로 심판하는 것만이 왜곡된 대선 지형을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도 공감을 얻고 있다.
강지원 변호사(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동 상임대표)는 “정치인들에게 기대할 게 없다면 유권자들이 심판할 수 밖에 없다”며 “지금이라도 각 후보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신문에 보도되는 정책 비교 기사를 읽어보는 등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전무도 “솔직히 유권자들이 현명해져야 한다. 색깔론, 지역감정, 네거티브 캠페인에 매달리는 정치인을 탓하기보다는 유권자들이 먼저 정책선거를 하고, 정책이행을 엄하게 사후 평가ㆍ감독하는 의식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김종한 tellme@hk.co.kr김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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