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이 점차 가까워지자 쉰들러 사장과 유대인 회계사 이츠하크 슈테른은 새 공장으로 함께 데려갈 직원 명단을 만들었다. 전원이 유대인이었으며 독일군 장교가 명단을 가져와 내게 타이프로 치라고 넘겨줬다. 배정된 인원이 몇 명 남아 있어 나와 친구 2명의 이름을 넣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처형될 위기에 있던 유대인 1,300여명의 목숨을 구한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한 타이피스트 미미 라인하르트(92)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미국 뉴욕에서 거주하다 1970년대에 이미 이주한 가족과 합류, 6일 이스라엘에 정착한 라인하르트는 텔아비브에서 영국 일간 옵서버와 인터뷰를 갖고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와 명단 작성에 관련된 비화를 털어 놓았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라인하르트는 폴란드 크라코프 교외의 플라스조프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 갔는데 그곳에는 악명 높은 친위대 SS 장교 아몬 괴트가 소장으로 있었다. 어려서 어머니의 권유로 취직하기 쉬운 실용 기술인 타자를 익힌 그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타자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적어 타자수로 뽑혔다.
쉰들러는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로 수용소의 유대인을 고용, 크라코프에 있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게 했지만 점차 그들의 운명을 동정하게 됐다. 그는 SS 친위대원들과 때로는 맞서면서 법랑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을 보호했고 나중에는 쥐데텐란트에서 탄약공장을 운영하며 유대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1944년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심사가 강화되면서 나치는 수용소의 유대인 대부분을 가스실에서 집단 학살했다. 때문에 ‘쉰들러 리스트’에 이름이 포함된 것은 홀로코스트에서 목숨을 구하는 증서나 마찬가지였다.
쉰들러의 유대인 직원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거쳐 브룬리츠의 새 공장으로 옮겨가는 우여곡절을 거쳤으나 다른 유대인과 달리 결국 모두 살아서 종전의 기쁨을 맞았다. 라인하르트는 브룬리치 공장에서 1945년까지 쉰들러의 비서로 근무했다.
라인하르트는 전쟁 후 쉰들러를 단 한 차례 만났다고 기억했다. 53년 무렵 오스트리아 빈 시내의 커피숍 부근을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거구의 중년 남자가 뛰어 왔다. 남자는 “미미, 미미...”라고 소리치며 라인하르트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놀라 얼굴을 보니 쉰들러였다고 한다. 쉰들러는 자신의 수용소에서 빼낸 유대인 생존자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라인하르트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왔던 것이다. 쉰들러는 74년 10월 사망했다.
라인하르트는 “만일 쉰들러가 살아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에 와서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을 자신의 일같이 기뻐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처럼 많은 유대인을 대학살에서 구한 쉰들러의 실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 <쉰들러 리스트> (1993)로 만들어져 전세계에 감동을 주었다. 라인하르트도 스필버그 감독의 초청을 받아 미국 시사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는 시사회장에 가서 앉아 있다가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 그대로 나와 버렸다. 쉰들러>
“당시의 기억과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볼 수 없었다”고 라인하르트는 말했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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