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중미술에 또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 황재형(55)은 스스로 제 이름을 지우려는 것 같았다. 83년 식솔을 이끌고 강원 태백의 황지로 들어가더니, 91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두문불출이었다. 광부로 일한다는 소문, 그래도 그림은 계속 그린다더라는 소식만이 간간이 서울에 들려왔다.
그로부터 16년. 태백 광산촌의 삶과 풍경을 핍진하게 화폭에 옮긴 그의 그림 60여점이 ‘쥘 흙과 뉠 땅’이란 제목으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걸렸다. 전시가 뜸했던 이유를 묻자 작가는 “남을 속이기는 쉬워도 나를 속이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남들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자기 눈엔 들지가 않았다고 했다.
도시의 허위의식에 지쳐 돌연 태백으로 들어간 그는 1년 6개월간 탄광 일을 직접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광부가 못 된다는 아픔만 겪었다. 그래서 더더욱 필사적으로 붓을 잡았다. “편안한 잠자리를 자는 사람에겐 각성을, 불편한 잠자리를 자는 사람에겐 진정한 안식을 주는 그림을 그리자. 작가라면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붓질이 삶의 진정성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면…, 오직 그 생각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한국 산업사회의 허파 노릇을 하던 태백의 과거부터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고 카지노와 위락시설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휘청거리는 오늘날까지, 한국 화단의 독보적인 리얼리스트의 눈으로 그는 태백의 흥망성쇠를 지켜봐 왔다. 새벽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광부들은 꼿꼿이 선 나무 같았고(‘기다리는 사람들’), 서로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까먹는 도시락은 눈물겹게 정겨웠다(‘식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막장 바깥으로 나온 순간 들이키는 첫 산소의 맛은 노을이 레몬빛으로 눈을 찌를 만큼 상쾌하고 청량했으며(‘저녁에’), 탄촌의 눈보라는 탄더미 속에 넋을 잃은 광부들의 원혼처럼 소용돌이쳤다(‘눈보라’). 고향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젊은 부부의 쓸쓸한 뒷모습에선 명절의 흥성거림도, 설렘도 느껴지지 않고(‘태백역 1시5분’), 태백의 산줄기는 주름진 어머니의 손마디처럼 마르고 강퍅했다(‘어머니’). 아리고 시큰한 황재형의 그림은 구경꾼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살아본 자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이다.
탄진이 눈앞에 날리는 것 같은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오치균의 사북 풍경이 떠오른다. 요즘 미술시장에서 가장 뜨겁게 호명되는 오치균은 선배가 사는 태백을 찾아가다가 사북의 풍경을 발견했고, 황재형은 “형도 전시 좀 해보라”는 후배의 권유로 오랜 침묵을 깼다. 재미있는 인연이다.
“그림에 대한 철학은 다르지만 경향성이 비슷해서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사이죠. 오치균의 붓질이 조형으로서의 붓질이라면 나의 붓질은 삶의 자국으로서의 붓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의 오랜만의 전시를 반기는 벗들은 많았다. 인터뷰 중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불쑥 들이닥쳤고, 서양화가 임옥상씨가 뒤 이어 찾아왔다. 80년대 민중미술을 하던 시절부터 선후배로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다.
“야야, 여긴 전깃줄이 너무 많다. 몇 개 지워라.”(유홍준) “야, 여기 물감 좀 더 바르지 그랬어. 그래야 오치균처럼 비싸지지.”(임옥상) 좋은 얘기는 도록 서문 쓸 때만 한다는 이들의 짓궂은 농담에 사람 좋은 작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감동으로 손이 떨렸다는 내심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는 내년 1월 6일까지. (02)720-1020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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