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왔다. <러브 액츄얼리> 처럼 ‘딱’이라는 감탄사를 붙일 영화를 기대하며,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괜스레 설레는 시즌이다. 러브>
그런데 올해 크리스마스(제목에 ‘크리스마스’가 들어가는) 영화 두 편은 ‘딱’을 붙이기가 좀 거시기하다. 하나는 노숙자(혹은 호모)가 주인공이고 다른 하나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왠지 크리스마스를 배반하는 듯한 배급사들의 작태(?)에 괘씸한 마음마저 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누그러진다. 몽클하게 기분을 들뜨게 하지는 않지만 천천히 가슴을 데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 연말의 극장가는, ‘크리스마스’보다 ‘성탄’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려 보인다.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화이트와 스카이블루가 어울리는 크리스마스. 그러나 이 영화는 둔탁한 브라운 컬러 속에 크리스마스를 그려 보인다. 배경은 도쿄의 뒷골목, 무료급식을 타 먹기 위해 억지로 목사의 설교를 듣는 노숙자들의 지겨운 표정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삼각김밥과 공동묘지에 추모객이 두고 간 술이 일용할 양식인 긴(알코올 중독자), 하나(호모), 미유키(가출 소녀)가 이 심상치않은 성탄 애니메이션의 주연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까칠한 세 사람이 크리스마스 저녁 티격태격 싸움을 시작한다. 무료한 시간을 죽이려는 듯 초점없이 거칠어지는 이들의 싸움을 멎게 만든 건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주제넘게(?) 버려진 아이에게 엄마를 찾아주기로 마음 먹으면서, 세 사람은 예상치 못했던 액션 활극과 감동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뒀던 과거의 상처들을 하나씩 치유해 나간다.
잘 나가는 경륜선수였지만 딸과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노숙자가 됐다는 긴. 그러나 그는 도박빚에 몰려 집을 도망쳐 나온 ‘아버지’일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여성을 꿈꾸는 하나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못생긴 외모 때문에 고통을 당해온 호모. 물어뜯을 듯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미유키도 실은 아빠를 칼로 찌른 아픈 기억에 빠져있다.
이 영화 속의 ‘기적’은 초자연적 이적이 아니라, 세 사람이 그 고통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용기다. 좌충우돌 액션소동과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가 밉게만 보이지 않는 것도, 그 진짜 기적의 실체를 훼손치 않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터치를 연상케 하는 세밀한 도쿄 풍경 묘사 덕에, 그 기적의 평범함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띤다.
<파프리카> <퍼펙트 블루> 등으로 독특한 세계관과 몽환적 이미지를 구축한 곤 사토시 감독이 인간미 넘치는 애니메이션 연출에도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작품. 원제는 <도쿄 갓파더(godfather)> . 13일 개봉. 12세 관람가. 도쿄> 퍼펙트> 파프리카>
■ 메리 크리스마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포가 뒤섞여 사람을 아수라로 만드는 전쟁터. 그곳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은 아마도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닐까.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14년 크리스마스, 독일군 점령 하의 프랑스 북부 전장에서 실제 일어난 작은 ‘휴전’의 기억을 기록한다.
1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서로 총부리를 겨눈 독일군과 프랑스ㆍ스코틀랜드 연합군. 참호 속에 웅크리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이곳에도 성탄절은 찾아온다. 총성이 잠시 멎은 성탄 전야, 스코틀랜드군 진영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백파이프 음악이 연주된다.
거기에 화답하듯, 독일군 진영에서도 캐럴을 부르는 멋진 테너의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찾아온 평화. 죽은 이의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던 참혹한 전장에서, 서로 잔을 나누고 함께 미사를 올리는 기적이 연출된다.
이 영화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기묘한 휴전의 아이러니를 밀도있게 파고들기보다는, 그 휴머니즘의 윤곽선을 어렵지않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인물의 고뇌와 전쟁의 차가운 질감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잠깐의 평화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의 본질을 단순하게 판타지화한 면도 없지않다. 그러나 적의 생존을 걱정하는 남자들의 순진한 우정과 반주 없이 울리는 전장의 아리아는,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작은 에피소드로 기억될 만하다.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다이앤 크루거, 벤노 퓨어만이 주연했다. 20일 개봉. 15세 관람가.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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