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아무리 땅에 묻고 짓밟아도 반드시 싹이 나게 마련입니다.”
197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춘천 강도살인 사건’ 범인으로 몰린 후 35년만에 명예가 회복된 정원섭(73)씨는 전북 한 산골마을에서 목사로 살고 있었다. 5일 그가 직접 세우고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교회에서 만난 그는 “지난 주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결정과 함께 재심 등 후속조치를 권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기쁘기보다는 멍하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만 생각났다”고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신학대학을 나온 그의 인생은 큰 아들(당시 8세)이 뇌척수막염에 걸리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모든 재산이 병원비로 다 들어갔지만 아이는 숨졌고 그는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와 만화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1972년 9월27일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경찰간부의 딸(당시 9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아이의 주머니에서 나온 만화가게표와 정씨가 사용하던 연필을 증거로 내세웠다. 그는 강간치사 및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수감된 후 생선장사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아내는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너무 억울해서 그는 교도소에서 세 차례나 자살기도를 했다. 하지만 신학대학 은사인 김재준 목사가 찾아와 “억울하다고 다 죽냐”는 말을 들은 후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치고 남성 성가대를 조직하고 밴드악단까지 구성해 지휘자를 맡았다.
그는 1987년 12월 모범수로 출소했다. 그래도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달라지지 않았다. 1988년 1월 아내에게만 말하고 누나가 살고 있는 전북 장수에 혼자 내려와 신학공부에 매달려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그는 아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하느님 손에 의해서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진 밀가루 반죽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겠다고 아우성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할 일은 잘 부풀고 익어서 맛있는 도너츠가 되는 것 뿐입니다.”
1992년 9월 목사가 되어 산골에 개척교회를 세웠다. 그는 교회에서 생활비를 지원 받지 않는 자비량 목회를 펼치며 생활비는 사슴 50여 마리를 키워 스스로 마련하고 있다. 신도들이 내는 헌금은 이웃에 있는 정신지체장애우나 불우노인 수용소에 모두 전달된다.
정씨는 그 동안 자신을 믿어준 아내와 자식들(2남2녀)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한다. “아내는 위원회 조사관이 ‘왜 아직까지 이혼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이혼은 생각치도 않았다’고 말하더군요.”
정씨는 그러나 자신을 고문하고도 끝내 고문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경찰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법원에서 명예회복이 되면 남은 소망은 죽을 때까지 설교를 하다가 죽는 것”이라며 “신문에 나오면 혹시라도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 중에 자신을 알아볼 수 있어 사진촬영에는 도저히 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99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자 2005년에 과거사 위원회에 신청했었다.
남원=최수학 기자 s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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