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의 대통령후보 벽보가 어느 때보다도 길다. 12명은 하나 같이 미소를 띠고 있지만, 보는 이의 마음은 편치 않다. 대선이 지독한 코미디나 비극이 되는 듯하다.
민주개혁계와 여성계, 보수계 등의 인사들은 정치적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유권자의 무신경에 자극을 주려는 성명과, 이를 견제하려는 성명이 대립하고 있다.
민주개혁계는 개혁진영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구체안을 제시했다. "대통령 후보의 준법정신과 정직성에 무관심하고 대기업과 부유층에 편중된 경제 살리기를 하는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 사이의 차이보다 더 선명한 가치 대립이 있겠느냐"는 말로 단결을 호소했다. 보수ㆍ수구세력에 맞서 진보ㆍ개혁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 긴 대선 벽보를 보는 착잡함
지난 달 29일자 한국일보 '아침을 열며' 난에는 이정철 숭실대 교수의 '우파는 부패로,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글이 실렸다. 보수ㆍ수구세력을 우파로, 진보ㆍ개혁세력을 좌파로 본다면, 그들이 실패하는 속성을 명쾌하게 갈파한 유익한 글이었다.
그러나 명석하고 정치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우파를 볼 때 그 글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무력감을 주기도 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보면 여러 비리 의혹에도 불구하고, 망하기는커녕 변함 없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 김근태 공동선대위원장이 최근 이에 대해 "우리 국민이 노망든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고 말했다가 혼만 났다. 그는 "이 후보는 처음부터 열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도 지지율은 변화가 없다. 발표되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슴에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국민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논란이 일자 "적절치 못한 단어 사용으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정중히 사과한다"고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명백한 실수였으나,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평가해야 할 진실과 고충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배경과 고충을 헤아리려 하기보다 그의 실언을 공격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상태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의식상태보다 더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갈파다. 국민이 우파의 부패에 너그러워진 대신 좌파에 대한 평가에서 매서워진 것은, 그만큼 좌파에 대해 싫증을 내고 있기 때문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따르면 "여론조사를 보면 진보와 중도를 지지하는 사람이 7~8할"이니 그것도 아니다. 이런 기현상과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번 대선의 최대 숙제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정철 교수의 글은 정곡을 찌르는 듯하다. 진보ㆍ개혁세력의 끝없는 분열과 소아적 결벽증이 패망을 자초한 것이다.
보수ㆍ수구세력은 외부의 크고 작은 공격에 끄떡없이 단결하고 있는데, 진보ㆍ개혁세력은 자기의 선명성과 분파적 무오류를 주장하기 위해 지난 10년 간 밖으로 향해야 할 화살을 안으로 쏟아 부어 왔다. 그 결과 중도를 포함하여 진보ㆍ개혁세력 전체가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잃었다.
진보ㆍ개혁계의 원로들이 뒤늦게 폭 넓은 단결을 호소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무책임한 분열주의와 무관심부터 반성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자신들이 그 동안 균형감 있게 보수ㆍ수구세력의 이기적 행태를 비판하고, 당당하게 진보ㆍ개혁세력을 지지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진보적 가치들 역시 끊임없이 다듬고 옹호되지 않으면 살아 남기 어렵다.
■ 후보검증에 거는 가냘픈 희망
지금 그 동안 나름대로 쌓여온 정당정치의 전통이 붕괴되는 위기에 놓여 있다. 정치에서 원칙과 도덕성이 가볍게 여겨지고, 그 틈을 타 후보들과 신당이 난립하여 민주정치의 건강성이 흐려지고 있다. 대선이 요식행위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짧게 남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TV 토론 등을 통한 엄격한 후보검증에 가냘픈 희망을 걸어 본다.
박래부 논설위원실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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