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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2류 통화

입력
2007.12.04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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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시대 군주(시뇨르)들은 재정 형편이 궁해지면 금화에 구리를 슬쩍 섞은 함량 미달의 화폐를 유통시켰다. 여기서 유래된 용어가 중앙은행의 '화폐주조이익'을 뜻하는 시뇨리지(seigniorage)다.

화폐의 액면가치에서 제조비용을 뺀 부분이다. 한국은행이 1만원짜리 화폐 한 장을 찍어내는 데 100원이 들었다면 차액인 9,900원이 시뇨리지다.

세계 공용의 화폐인 미국 달러화도 시뇨리지 효과를 누린다. 경상수지와 무역수지를 합쳐 한해 1조 달러가 넘는 쌍둥이 적자를 내면서도 미국 경제가 파산을 걱정하지 않는 것도 그 덕분이다.

▦1945년 달러를 세계 기축통화로 결정한 브래튼우즈 체제 이래 공고하게 유지되던 달러의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 1년에만 달러의 가치는 12% 가까이 폭락했다.

여기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가 악성 신용경색으로 번지면서 달러의 미래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 올 5월 쿠웨이트가 달러에 자국 통화를 고정시키는 페그제를 폐기하고, 다른 산유국들도 비슷한 조치를 검토하는 것은 그런 예다.

달러 대신 유로화 보유 비중을 높이는 나라도 줄을 잇는다. 중국이 달러 비중을 축소한다고 말하자 국제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진 일도 있다.

▦미국은 강한 달러를 표방하지만, 의도적으로 달러 약세를 방치한다는 혐의를 받는다.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덕택에 한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7% 수준까지 치솟았던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는 5.5% 수준까지 낮아진 상태다. 반면에 달러 약세로 인해 유로화의 가치가 급상승하면서 유럽 기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미국의 보잉사와 경쟁해야 하는 에어버스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가 달러를 '서브프라임 통화(2류 통화)'라고 비아냥대는 배경에도 그런 불만이 담겨 있다.

▦그렇더라도 달러 패권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세계 금융시장에서 달러화가 퇴조하고 대신 오일달러, 아시아 중앙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 등 4대 신흥세력이 급부상할 것이라는 국내 보고서도 나왔다. 브라질 출신 세계적 모델 지젤 번천이 달러 대신 유로화로 모델료를 달라고 요구할 정도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수출 대금을 대부분 달러로 결제하고, 2,60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 대부분을 달러 채권으로 보유한 우리 입장에서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변혁이 다가오고 있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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