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 학고재이용희와 이동주, 정치학과 미술사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가 1997년 12월 4일 사망했다. 80세였다. 그의 책들을 떠올리자니, ‘공부’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뒤 국토통일원장관과 UN총회 한국대표 등을 역임한 이용희는 한국 국제정치학의 개척자다. 그의 책으로 처음 읽은 것은 <일반국제정치학(상)> 이다. 놀라웠다. 이 책은 그가 한국에서 국제정치학을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립시키기 위해 교과서로 썼다는 책이다. 일반국제정치학(상)>
국제정치의 현실과 본질을, 그는 뚜렷한 한국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두터운 이론적 근거와 명료한 문장으로, 교과서 같지 않게 풀어내고 있었다. 겉보기는 그럴듯해 보이는데 막상 눈으로 보는 현실과는 어긋나기만 하는 수많은 수입 이론과 학설로 도배된 ‘교과서들’에 절망하던 대학시절, 참으로 신선하고 충격적인 책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을 더듬어 그의 다른 저서들을 찾아보는데, 미술 책이 여럿 있는 것 아닌가. 저자명을 본명 아닌 아호를 써서 이동주로 한 <우리나라의 옛 그림> (초판 1975년, 수정증보판 1995년)을 읽고 다시 놀랐다. 우리나라의>
“동(東) 자 주(洲) 자로 남 앞에 나서는 일은 되도록 피합니다만”이라며 정치학이 본업인 자신이 미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먼저 겸양한 그는, 이 책에서 우리 옛그림들을 보며 즐겨온 자신의 편력과 그것을 위해 서구의 미술사와 연구방법론을 섭렵한 과정, 한국화 감상법, 단원 겸재 완당 등에 관한 치밀한 분석까지 내놓고 있었다.
“어떠한 감각적인 것을 초월하려고 하는 회화의 세계, 그곳에서 비로소 깊이와 위력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림을 보는 우리의 눈도 단순히 감각적인 미감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밑받침하던 철학, 생의 성격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보고 즐기는 데서 시작한 정치학자 이용희의 한국화 공부는 그의 ‘생의 다른 한 줄기’가 됐고, 한국 미술사학의 수준까지 바꿔놓았다. 진짜 공부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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