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동네 잔치에 딴지 걸 마음은 없지만 올해 청룡영화제가 ‘베스트드레서상’을 신설한 것은 아무리 봐도 넌센스다. 무슨 복장파티도 아니고, 영화의 완성도와 연기력을 평가하는 시상식에서 누가 더 멋지게 차려 입었나를 따져 상을 줬다.
감독상 수상자는 몰라도 어느 여배우의 노출이 심했는지는 화제가 되는 시대를 살다 보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더 많은 참여와 관심을 끌어내고픈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는 한다. 영화의 완성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영화의상상’은 없는 영화제가 베스트드레서상을 만든 속내야 뻔한 것 아닌가.
오히려 안타까운 것은 인기 스타들의 레드카펫 패션이다. 노출에 관대해진 사회를 반영하듯 대담하고 화려한 드레스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방불케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의상들이 예외 없이 수입브랜드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눈의 호사’가 마냥 즐겁지 만은 않다.
여우주연상을 탄 전도연의 핫핑크 드레스는 1930년대를 풍미한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에 대한 크리스찬 디올 식의 오마주다. 거의 흘러내릴 듯 한 노출로 화제를 모은 김윤진의 벨벳 드레스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컬렉션라인인 아르마니 프리베 제품이다. 김혜수의 우아한 여신 드레스는 블루마린 제품이었다. 박시연의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는 구치였고 강성연은 로베르또 까발리, 손예진은 도나 카란, 한예슬은 블루걸 등등 끝도 없다.
온라인에서는 노출 정도가 화제의 중심이지만, 패션브랜드 쪽에서 보면 레드카펫은 이미지홍보를 위한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이다. 매출로 직결되지는 않지만, 어떤 여배우가 입었느냐에 따라서 브랜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톱스타에게 입히기 위한 브랜드의 총력전은 “전쟁이 따로 없다” 소리가 나올 정도다.
레드카펫에 나오는 옷들은 이미 행사 두세 달 전부터 본국에서 들여온다. 공수된 드레스는 스타일리스트의 손을 통해 주인 찾기의 길고 험난한 여정에 들어간다. 영화제 사회를 보거나 여우주연상 물망에 오른 톱스타는 우선 선택권을 쥐지만, 그들이 장고에 들어가면 다른 여배우들은 시상식 전날까지도 여기저기서 퇴짜 맞고 남은 것들 중에서 고르느라 또 고심한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상대적으로 선택폭이 넓은 국내 디자이너브랜드를 택하겠다고? 레드카펫 식 셈법은 다르다.
한 스타일리스트는 “스타들 쪽에서도 어떤 브랜드를 입느냐가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주는 잣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입 럭셔리가 아닌 한 아무리 고급이라 해도 국내제품은 선호도가 크게 떨어진다“고 귀띔한다. 패션업체들의 대응도 소극적이다. 한 여성복 관계자는 “홍보차원에서 영화제를 위한 이브닝드레스를 따로 제작할 필요성은 느끼지만 막상 많이 팔리는 제품도 아니고, 기존 제품에 치중하다 보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가물에 콩 나듯 보였던 오브제나 미스지콜렉션 등의 이름도 이번 대회에선 싹 사라졌다. 어쩌면 레드카펫 위에서 벌어지는 드레스 전쟁은 한국 패션계가 직면한 현실을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뜨겁게 부풀었으되 정작 과실은 수입브랜드가 따는. 영화제가 옷차림을 시상하는 것 만큼이나 참 엉뚱한 결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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