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미 지음 / 창비 발행ㆍ300쪽ㆍ1만5,000원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일제 시기에 한국인의 의식에 뿌리를 내린 근대의 이상적 여성상이었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유학한 조선인 여학생들의 의식과 귀국 후의 삶, 그들이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분석한 <근대여성…> 은 ‘현모양처’가 유교적 여성관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뒤엎는다. 근대여성…>
현재 일본 쓰꾸바대학 전임강사로 있는 저자는 일제 하 조선 여성들의 일본 유학실태를 분석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1910년 34명에 불과했던 유학생 수가 식민시대 말기인 1942년에 2,947명으로 늘어날 만큼 조선 여성들의 일본 유학은 괄목할 만한 사회현상이었다.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ㆍ여성운동을 이끌기도 하고 연애결혼 양장 패션 등을 퍼뜨리며 문화의 선도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교사 의사 예술가 등 전문가로 사회에 진출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중 뚜렷한 것이 현모양처라는 근대적 젠더규범의 정착에 이들이 한 역할이다.
저자는 이들이 신문, 잡지에 남긴 글 등 여러 자료를 분석해 구한말 일본에서 들어온 현모양처론이 1920,30년대 일본에서 주로 가정학을 배운 여성 유학생들에 의해 널리 보급됐다는 것을 밝힌다. 현모양처는 여성을 한 집안의 며느리(자손 생산, 가사일, 시부모 봉양, 제사 일을 하는)가 아니라 어머니(자녀 교육자), 아내(남편 내조자), 주부(가정 책임자)로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많은 조선 여성들이 일본에 유학갔을까. 저자는 조선이 일본이라는 중심(메트로폴리스)의 주변으로 전락하면서 메트로폴리스의 선진성과 문화를 갈망하는 ‘메트로폴리스 지향’이 퍼진 것이 그 주된 배경이었음을 밝힌다.
바다로 간 연어가 부화한 강으로 돌아오듯이, 조선 여성들의 일본 유학은 청운의 꿈을 품고 마을을 떠나 도회지로, 경성으로, 도쿄로 이동하고 새로운 문명을 흡수해 많은 경우 교사가 되어 이야깃거리를 안고 근대문화의 냄새를 풍기며 마을로 돌아오는 식민지 고유의 사회문화적 순환 현상이었다.
해방으로 이 순환은 단절됐고 일본을 대신해 미국이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메트로폴리스가 됐다. 2005년 나온 일본어판을 저자가 직접 한국어로 번역했다.
남경욱 기자 kwn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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