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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펴낸 소설가 김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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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펴낸 소설가 김태용

입력
2007.12.0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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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 도시에서 ‘나’는 만삭인 친구 아내의 배를 터뜨리고픈 욕구에 우산 촉을 뾰족히 갈고(‘검은 태양 아래’), 노부부는 서로의 발 옆에 머리를 두고 풀밭에 누워 ‘???’ 돼지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눈다(‘풀밭 위의 돼지’). 떼지어 행동하고 섹스하는 ‘우리’는 각자 경멸하는 물건을 실은 쇼핑카트를 끌고 고층 건물에서 투신한다(‘차라리, 사랑’).

소설가 김태용(33)씨가 등단 2년만에 낸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문학과지성사 발행)는 이런 기괴한 서사들로 그득하다. 일상적 어휘로 이뤄진 수식 없는 단문들은 읽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그 문장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낯설고 때론 불편하다. 익숙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당도한 듯한, 기묘한 인식의 부조화가 김씨를 동세대 작가들과 구별짓는다.

김태용 소설의 낯섦은 그가 지닌 사전(辭典)에서 연유한다. 그 사전의 단어 옆엔 우리가 알던 의미가 지워져 있다. 등단작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에 나오는 애완 고양이 이름은 ‘돼지’다. 고양이 출입을 금지하는 동물원 직원에게 가족들은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돼지”라고 항의하고, ‘돼지’는 개 사료를 게걸스레 먹으며 이름에 값한다. 돼지 아닌 존재를 ‘돼지’라 부르자 돼지가 되는, 존재(의미)는 이름(언어)에 선행한다고 믿었던 통념이 무화되는 상황이다. 표제작의 인물들은 아예 인간의 언어를 버리고, 돼지의 말로 의사소통한다.

김씨는 “문학의 핵심은 언어인데, 정작 소설에서 언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말한다. 윤대녕씨의 단편 ‘편백나무숲 쪽으로’를 전복적으로 패러디했다는 ‘의심’을 받는 ‘편백나무 숲 밖으로’는 의미를 품은 언어로 구축된 세계의 표상인 편백나무 숲에서 도망쳐 나온 ‘나’의 독백을 담은 작품으로, 언어의 통념과 대결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오롯하다. 표제작이나 ‘잠’의 화자들은 같은 단어를 거듭 반복하며 긴 혼잣말을 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중얼거려서라도 존재를 확인하려는, 언어에 대한 강박적 의존을 드러낸다.

김씨는 “언어를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단어들이 만날 때 발생하는 충격과 아우라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서 “언어 실험으로 포착한 이미지들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그 주제란 소통 불가능성, 세계와의 불협화음에 관한 것으로, 문학적 주제로서 그리 낯설지 않다.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타인과의 소통에 곤란을 겪거나, 세상에 대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일에 실패한다.

지레 벙어리를 자처하거나(‘벙어리’) 좌절감을 감추고 위악적 태도로 일관(‘검은 태양 아래’)하기도 한다. 익숙한 테마를 첨단의 언어 실험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김씨는 ‘낯설게하기’란 문학의 고전적 본령에 충실한 작가다. 김씨는 “글쓰기나 독서는 본래 오독의 과정”이라며 “독자가 내 소설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도중에 내팽개친다면 작가로서 실패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작품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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