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새벽 5시50분(한국시간), 제142차 세계박람회기구(BIE) 총회가 열린 프랑스 파리 팔레 드 콩그레.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한 여수(68표)가 경쟁 후보인 모로코(탕헤르ㆍ59표)를 놓고 마지막 결선투표가 시작됐다.
5년 전 결선투표 끝에 중국 상하이에 패했던 모나코 총회 당시의 악몽이 재연되는 것일까. 한국유치단 얼굴에 초조함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순간, ‘여수 77표 탕헤르 63표’로 여수 개최가 확정 발표됐고 유치단은 왈칵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29만 여수 시민이 해냈다.”
전남 여수 시민들이 5년의 절치부심 끝에 값진 승리를 일궈냈다. 절망의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여수 시민들의 도전은 승리의 여신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여수 시민들이 이룬 쾌거의 원동력은 무엇보다 ‘다시 한번 해보자’는 굳은 의지였다. 2002년 12월, ‘2010년 세계박람회 유치’에 실패한 뒤 깊은 절망과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시민들이었지만 곧 심기일전의 자세로 똘똘 뭉쳤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마라. 기회는 또 온다.” 박람회 유치 재도전에 나선 시민들은 이를 악물었다. 여수 전체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8만여명이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정도로 시민들의 박람회 유치 열정은 뜨거웠다. 특히 4월 여수를 찾은 BIE 실사단에게 감동을 안겨줬던 시민들은 이후 매일 낮 12시 박람회 유치를 위한 ‘소망의 기도’를 올리며 유치 의지를 다졌다.
박수홍(44ㆍ여수시 연등동)씨는 “자원봉사를 통해 시민들의 결속력은 물론 공동체의식까지 형성되면서 박람회 유치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며 “박람회 유치를 통해 의지는 환경과 조건 보다 더 강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여수 시민의 열정에 감복한 정부와 재계도 총력전을 폈다. 2002년 때처럼 또 다시 외교력 부족과 무관심 때문에 졌다는 오명을 들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여수세계박람회를 국가계획으로 확정(2004년), 여수 시민들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유치단은 530여일간 지구를 42바퀴(167만7,200㎞)나 비행하며 BIE 회원국을 일일이 방문, 여수 지원을 요청했다.
그야말로 모든 외교 역량을 쏟아부은 것이다. 현대ㆍ기아차그룹과 삼성, LG, SK 등 대기업의 아낌없는 물밑 지원도 큰 힘이 됐다.
그럼에도 승리는 막판까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슬람ㆍ아프리카권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노린 모로코가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BIE에 가입시키며 여수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로코는 인류가 닥친 지구환경문제를 주제로 삼아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 여수 시민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유치단 300여명은 28일 오전 10시 귀국할 예정이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유치단에 축전을 보냈다.
●엑스포'경제 올림픽-월드컵' 불려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엑스포(Expo)는 영어 'Exposition'에서 나온 말로 세계박람회라고도 불린다. 최초 엑스포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됐으며, 2005년 일본 아이치 엑스포까지 총 106차례 열렸다.
우리나라는 1893년 시카고 엑스포에 처음 참가해 기와집과 관복, 도자기, 갑옷 등을 소개했다. 엑스포는 5년마다 열리는 등록엑스포와, 등록엑스포 사이에 한차례 열리는 인정엑스포로 나뉘는데 1993년 대전엑스포와 여수엑스포는 인정엑스포다.
여수=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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