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비극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지 오래다. 사회주의 학자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고통 받는 자와 연결을 느끼는, 윤리적 요구에 부합하는 감정이 현대인에게는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 비극이 끊임없이 공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연극 양식과 미학적 기원에 대한 탐구욕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비극성의 심미적 즐거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공연 중에 있는 <오레스테스> 도 이 범주 안에 놓을 수 있다. 오레스테스>
극단 백수광부의 <오레스테스> 는 비극에 대한 당대의 해석이나 도발적인 해체보다는 보편적인 접근방식을 따른다. 절박한 실존적 선택 앞에 놓인 주인공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선택의 갈래에 직면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혼돈과 선택 이후의 회의와 공허함을 겹쳐놓는다. 오레스테스>
극은 오레스테스의 귓전을 괴롭히는 ‘개인’ 오레스테스에게 부과된 사회적, 집단적 운명의 부름들로 시작된다. 이것은 마치 근대의 입구에서 개인 ‘햄릿’을 괴롭혔던 소음과 유사한 것이다. 복수의 도구로 몰린 한 개인이 느끼는 삶의 부조리함, 예술가이자 학자인 햄릿이 펜 대신 칼을 쥘 수밖에 없었듯이 오레스테스는 시인에서 무사가 되어야 한다.
동토를 배경으로 극이 진행된다든가 파수병이 등장하는 프롤로그 부분, 햄릿의 묘지기 장면에 필적할 파수병들의 재담 장면 등 아이스퀼로스의 원작, 햄릿, 그리고 이번 공연 사이의 상호텍스트성(문학은 사회 관습에 귀속되기 때문에 나라별로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의미)이 흥미롭다.
연극은 주역 박지일에 의존하는 몫이 절대적인데 그가 수행하는 오레스테스는 친근함과 고결함을 겹으로 하여 배우 자신이 가진 존재감을 십분 활용해 간다. 과감하게 흰색으로 삼면을 채운 손호성의 무대는 문자 그대로 원로와 시민들의 두려움, 등장인물의 욕망, 쫓김과 운명의 구속 등으로 얼룩진 내면들을 반영(反影)한다.
조명과 만나 그림자극처럼 얼룩지는 인물들의 움직임이 효과적이다. 이것은 극중 피로 물드는 친족살해의 비극적 공간, 황폐한 내면과 황량한 자연을 표현해 내는데도 적절했다.
삶이란 그림자 무도회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오레스테스 자신 또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 이 모든 허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을 해야만 하고, 행동하고, 득죄하며, 살아가고, 노래해야 한다고 연극은 말한다.
신체적 움직임과 리듬감을 부여한 원로와 시민들의 간결한 코러스 배치, 고대비극의 시적 수사와 인물이 놓인 입장을 강력히 대변하는 논리적 쟁투를 현대적 일상어로 자연스레 녹인 점이 이번 공연의 성과다. 고영범 각색, 이성열 연출, 다음달 2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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