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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4> 헤이그-밤의 북해(北海), 돌아오지 않는 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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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4> 헤이그-밤의 북해(北海), 돌아오지 않는 밀사

입력
2007.12.0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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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네덜란드 도시들의 기억을 세 차례 더듬어볼 참인데, 어쩔 수 없이 ‘유럽의 기자들’ 얘기를 또 끄집어낼 수밖에 없겠다. 혼자서나 다른 친구들과 암스테르담에 들른 적이 몇 차례 있긴 하지만, 내가 네덜란드에 처음 가본 것은 ‘유럽의 기자들’ 동료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자들’은 프로그램 첫머리에 유럽 나라 하나를 골라 일주일간 단체여행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한 기(期)의 참가 기자 전부가 함께 움직이는 여행은, 프로그램 끝머리의 ‘졸업여행’을 제외하면, 이것이 유일하다.

재단이 프로그램 초기에 이 단체여행을 꾸리는 것은 참가 기자들 사이의 서먹서먹함을 되도록 빨리 없애기 위해서다. 아침 6시 이전에 일어나 종일 함께 움직이다가 밤 10시가 넘어야 자유시간을 얻게 되는 ‘단체생활’을 일주일쯤 하게 되면, 어느덧 서로 스스럼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유럽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음이 깨지는 것이다.

내가 참가한 1992~93년 ‘유럽의 기자들’의 경우엔, 그 단체여행을 네덜란드로 갔다. 돌이켜보면 외국인 동료들과 금세 친하게 된 게 그 일주일간의 여행 덕분이긴 하지만, 당시엔 그 여행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내 게으른 몸이 감당하기엔 일정이 너무 빡빡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외무부가 촘촘히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우리는 기계처럼, 노예처럼 움직여야 했다.

본디 바지런하고 순응적인 친구들한테야 그게 별것 아닐 수 있었겠으나, 규율을 잃은 지 오래였던 내 몸뚱이는 파리로 돌아오는 열차에 실리기 전까지 줄곧 삐걱거렸다. 그래도 나는 순간순간을 즐기려 안간힘을 썼다.

네덜란드 정부 부처들, 중요 도시의 시청들, 왕궁들에서부터 치즈농장, 꽃 경매장, 피임약 제조업체, 국립 무용극장, 유대역사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며 간담회, 설명회, 시찰, 관람, 만찬 따위에 참가해야 했다. 네덜란드 외무부는 그 일주일 동안 제 나라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했다.

우리는 전세 버스에 실려 이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기업인, 정치인, 농부, 귀족, 왕족, 학자들을 만났다. 자리도 지루했고 사람들도 지루했다. 그나마 즐거운 것은 만찬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사나흘째부터는 몸이 고달파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유럽의 기자들’ 1주일간 단체여행

우리들 숙소는 헤이그의 바트 호텔이었다. 이 호텔을 베이스캠프 삼아 우리는 일주일간 네덜란드 땅을 누볐다. 북해의 스헤베닝겐 해변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바트 호텔은 수영장과 카지노까지 갖춰 겉보기에는 그럴싸했으나, 방음 시설이 신통치 않았다. 해안도로에서 나는 소음은 쉽사리 내 베갯머리까지 파고들었다.

호텔업자가 카지노에 들일 돈을 방음시설에 들였다면, 훨씬 아늑한 호텔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헤이그 사람들은 어찌나 근면한지 새벽 다섯 시 이전부터 클랙슨 소리, 전차엔진 소리로 나를 괴롭혔다.

내가 특별히 예민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방을 함께 쓴 세네갈 친구 압둘라이 N.은 그런 소음에 끄떡없었으니 말이다. 바트 호텔에서 우리는 두 명이 한 방을 나눠 썼다. 임시 간사 노릇을 했던 아일랜드 친구 캐서린 M.이 각자의 룸메이트를 정했다. 처음에 그녀는 ‘선린’ 원칙에 따라 가까운 나라 동료들끼리 한 방을 쓰도록 짝을 정했다.

그래서 일본인 동료 시노부 T.가 내 룸메이트가 될 뻔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이내, 재단 사무장 기유메트 T. d. C.의 조언에 따라, ‘원교근공’이 우정을 지구적으로 확산하는 데 더 낫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녀는 ‘짝짓기’를 새로 했고, 그래서 지리적 인종적으로 먼 나라 기자들끼리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압둘라이도 나도 한 방을 쓰게 된 게 편치는 않았다. 그는 술은 물론 담배도 입에 대지 않는 이슬람 신자였고, 나는 지독한 골초에다 술 숭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술병을 방안에 들이지 말 것과 담배는 화장실에서만 피울 것을 조심스럽게 요구했다.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그러자 그는 용기를 얻었는지, 한 가지만 더 부탁하겠다며, 자신이 기도를 할 때는 무심해져 달라고 부탁했다. 이교도 옆에서 기도하는 게 좀 스스러웠나 보다. 나는 거기에도 기꺼이 동의했다. 착한 한국 남자는 까다로운 세네갈 동료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압둘라이는 다카르에서 나오는 풍자신문 <르 카파르 리베레> 의 기자였다. ‘르 카파르 리베레’는 ‘해방된 바퀴벌레’라는 뜻이다. 대번에, 파리에서 나오는 풍자신문 <르 카나르 앙셰네> (사슬에 묶인 오리)를 비튼 제호라는 걸 알 수 있다. 바퀴벌레를 뜻하는 ‘카파르’에는 고자질꾼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 해석하면, 신문 제호로 그럴싸하다.

네덜란드 일정이 하도 촘촘했던 터라, 내 기억 속에서 그 일주일간의 사건과 공간이 또렷이 연결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헤이그에서 겪은 듯도 하고, 로테르담에서 겪은 듯도 하고, 암스테르담이나 그 교외의 잔제스한스에서 겪은 듯도 하고, 알크마르나 위트레흐트나 레이덴에서 겪은 듯도 하다. 버스에서 졸다 내리고 졸다 내리는 게 일이었으니.

그래도 또렷한 헤이그 기억을 골라내 보자. 나는 헤이그에서 유럽의 밤바다와 새벽바다를 처음 보았다. 낮에는 버스를 타고 네덜란드를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느라 해변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 밤 열시 이후와 아침 여섯 시 이전만 ‘사생활’이 가능한 여행이었다. 클랙슨 소리에 깨 다시 잠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됐을 때, 나는 새벽바다로 나갔다. 몸은 피곤하지만 이 시절이 낭만의 끝이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나는 밤바다로 나갔다.

■ “낭만의 시절도 끝나는구나” 감회

밤의 북해를 보고 와서는 서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그러니까 헤이그의 바트 호텔에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밤 서울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여행 마지막 밤에 서울의 E.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헤이그가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도시라는 게 그제야 떠올랐다고 털어놓았다. 정말 그랬다. 헤이그에 있던 일주일 동안, 나는 이 도시에서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심한 한국인이었다.

바트 호텔의 지하 바는 잠을 줄이고서라도 악착같이 놀아보려는 쾌락주의자들의 공간이었다. 그 지하 바에서, 나는 동료들의 오리엔탈리즘에 편승해 아마추어 점술사를 자처하며 그들의 손금을 보아주었다. 때론 그들의 이름을 한글로 써 보인 뒤 그 획수를 세서 그들의 미래를 예언하고 생의 지침을 내렸다.

처음 보는 문자에서 어떤 주술적 신비를 느꼈는지, 내 순박한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내가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샘이 났던 것일까? 도쿄에서 온 시노부도 이내 제 자리에서 비슷한 야바위판을 벌였다.

바 옆에는 탁구대가 둘 놓여 있었다. 처음엔 몇몇 친구들이 단식으로 치다가, 탁구대 주변으로 동료들이 몰리면서 이내 혼성 복식 경기가 벌어졌다.

내 또래 한국인들의 평균에도 못 미칠 내 탁구 실력이 ‘유럽의 기자들’ 안에서는 발군이었다. 스웨덴 동료 소피 R.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과 스웨덴이 원체 탁구 강국이어서 그랬던 걸까? 아무튼 소피와 내가 한 조가 되면 무적이었다. 중국인 동료가 없었던 게 다행이다.

네덜란드 헌법은 암스테르담을 이 나라 수도로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수도 노릇을 하는 도시는 헤이그다. 총리실과 외무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과 국회가 이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스 여왕도 이곳의 노르트에인더 궁에서 집무를 한다. 이 건물들이 모여있는 구역이 비넨호프(內城)다.

헤이그가 역사적으로 홀란드 정치행정의 중심지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일종의 어부지리였다. 레이덴이나 도르트레흐트나 델프트처럼 헤이그보다 힘이 셌던 홀란드 도시들이 자기들끼리의 타협책으로 ‘별볼일 없는 도시’ 헤이그에 정치행정 중심지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다른 힘센 놈에게 넘기느니 힘없는 놈에게 넘기는 게 낫다 판단한 것이다.

■ 국회·궁전… 네덜란드 정치행정의 중심지

하루는, 노르트에인더 궁에서 벌어진 만찬에 ‘유럽의 기자들’이 초대됐다. 호스트는 여왕의 동생 프린세스 마르흐레흐트와 그 부군이었다. 손님들 가운덴 공후백자남이 지천이었다. 어느 백작부인이 내게 물었다. “파리 생활은 어때요?” “아직은 불편한 점이 많죠.” “뭐가 제일 불편해요?” “제 경우엔 언어예요. 거기선 영어가 잘 안 통하니까요. 네덜란드에 오니 해방된 기분이에요.” “그래요. 프랑스에선 프랑스어가 서툴면 아주 불편하죠.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이상하다뇨?”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프랑스어를 모르면 프랑스어를 모른다고 구박하고, 프랑스어를 알면 프랑스어를 잘 알지 못한다고 구박하거든요.”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맞아요, 그래요.”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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