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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잘라낸 건축물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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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잘라낸 건축물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조

입력
2007.12.0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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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마타-클락(1943-1978)은 미국 뉴욕의 소호를 예술가들의 공동체로 만든 선구자로, 폐가옥을 반으로 가르거나, 폐공장의 벽체를 기하학적 모양으로 뚫는 등, 상상을 넘어서는 스케일의 작업으로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겼다. 지금은 소호가 관광객들이나 찾는 촌티 나는 ‘쇼핑의 거리’가 되고 말았지만, 한때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 그곳엔 마타-클락이라는 영민한 청년과 그의 동료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음식점 ‘푸드’와 대안적인 스튜디오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작가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쌍둥이 형제 바탄과 함께 태어났다. 아버지는 칠레 태생의 화가 로베르토 마타(1911-2002)고, 어머니는 미국인으로 (역시 작가인) 앤 클락이다. 본디 건축을 전공한 마타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밑에서 도제로 일하다가, 초현실주의 회화에 경도돼 화가로 전업,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생전의 작가는 가부장으로서 무책임했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친의 권고로 코넬대에서 건축을 전공하긴 했지만, 결국 그도 예술가로 전업했다. 로베르토 마타가 아들의 작품에 침을 뱉으며 “네가 예술이 뭔지나 아냐”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1971년 고든 마타는 자신의 성을 마타-클락으로 변경했다. 아버지에 대한 거부이자 어머니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을 터.

그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로, 학생혁명과 대지미술이 꼽힌다. 1968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1년간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며 68학생혁명을 체험한 그는, 이후 기 드보르를 위시한 상황주의자들의 철학에 동조했다. 이듬해인 1969년 미국에 돌아온 그는, 코넬대 미술관에서 열린 ‘대지 미술’전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기존에 존재하는 예술적 요소들을 새로운 앙상블로 재활용’하는 상황주의의 논리와 ‘장소 특정성’을 추구하는 대지 미술의 특성을 결합한 작가는, ‘건물 자르기’라는 자신의 독창적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는 농반진반으로 자신의 ‘건물 자르기’ 작업을 ‘아나키텍처’(아나키+아키텍처)라고 불렀다.

하지만 ‘천재는 단명’이랬던가. 정신병력이 있던 바탄은 1976년 고든의 스튜디오 창문에서 추락사했다. (바탄이란 이름에는 ‘빠지다, 꺼지다’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2년 뒤, 고든도 췌장암으로 급서했다. 불과 31세였다.

아나키텍처의 과정 중심적인 작업은 한시적이었기 때문에, 남아 전하는 것은 약간의 서류와 드로잉, 사진과 필름 기록, 그리고 건물에서 잘라낸 조각들뿐이다. 그러나, 후대에 미친 영향이 점차 명확히 드러나는 오늘, 남은 자료들-과거의 행위를 추적하기엔 충분한-은 더욱 괴괴히 빛을 발한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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