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했던 관중들의 환호성도, 감격적인 승리의 기쁨도 어느덧 혼자만의 것으로 남아 있는 시간, 나는 호텔 침대에 누워 카라스키야와의 경기장면을 회상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경기에서 승리했음에도 그날은 왠지 허무하고 마음 한편이 쓸쓸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카라스키야는 얼마나 괴로울까?' 아마도 링위에서 쓰러져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잘 모른다. 내가 겪은 패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그 유명한 복서인 로베르토 두란(파나마)이 찾아온 것이다. 두란이 누군가. 세계 권투사에 길이 남을 명복서가 날 찾아오다니 잠시 어리둥절했다. 두란은 축하 인사를 건네며 나를 살갑게 안아주었다. 동양에서 온 낯선 선수가 승리를 거둔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 위해 온 것이다.
당시에도 돌주먹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정말이지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그 후에도 두란은 슈가레이 레너드, 토마스 헌즈, 마빈 헤글러 등과 맞붙으며 복싱팬들에게 빅 카드를 제공했는데, 이런 거물이 나를 축하하러 호텔까지 찾아 왔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내가 카라스키야를 이기지 못했다면 내가 직접 두란의 숙소로 찾아갔어도 그를 만나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내가 카라스키야라는 거목을 쓰러뜨린 주인공이었기에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뿐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그만큼 카라스키야 전이 복싱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당시 찾아온 두란과 같이 기념사진 한 장 못 찍은 것이다. 카라스키야전에서 4번이나 다운 당했던 후유증이 그때 나타났을까.
우리 일행은 다음날 과테말라로 도망가다시피 했다. 카라스키야가 이겼다면 세계챔피언 4명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내가 찬물을 끼얹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총을 갖고 있었고 콜롬비아 축구 선수가 자살골 먹었다고 총으로 쏴 죽인 사건도 떠올랐다.
다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울을 향할 때 기장이 일등석을 마련해주는 고마운 일도 있었다. 그리고 기내 방송을 통해 "이 비행기에는 세계챔피언 홍수환씨가 타고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렸다. 순간, 웅성거림과 함께 여기 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서울에 도착하자 다시 한번 세계챔피언 등극의 기쁨을 만끽 할 수 있었다. 사모라에게 두 번씩이나 패해 실망을 안겨줬던 국민들 앞에 금의환향하는 기쁨은 정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손에 손에 '대한민국 만세'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지난 패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나를 환영해 주던 우리 국민들의 뜨거운 격려의 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당시 에피소드 한가지를 소개한다. 귀국해 며칠 지나지 않아 정부에서는 우리 일행을 문교부 장관실로 초청해 금메달을 걸어주었다. 손바닥만한 메달이 목에 걸리는 느낌이 묵직한 게 꽤나 큰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송구스럽기조차 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금메달에 녹이 슬기 시작했다. 같이 장관실에 초청됐던 일행에게 전화를 걸어 메달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자기들 것도 녹이 슬었다는 것이다.
그냥 밥이나 한 끼 먹여서 보내면 차라리 기분이나 상하지 않을 것을…. 가짜 금메달이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아주 씁쓸했다. 그것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금메달이 몇 돈짜린지 구경이나 좀 해 보자며 집으로 찾아와 우리 가족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세계챔피언 벨트를 두 번씩이나 따고 돌아왔으니 금메달도 보통 메달은 아닐 거라고 철석같이 믿던 사람들, 내가 받은 진짜 금메달은 항상 나를 응원해주던 국민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흔히 복싱은 배고픈 사람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알고 있다. 나 또한 챔피언이 돼서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보겠다는 각오로 복싱을 시작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돈이 전부였다면 차라리 도중에 다른 직업을 택했지 10년 동안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복싱이 '헝그리 정신'의 산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 '헝그리'를 단순한 육체적 허기가 아니라 정신력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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