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도 부족함이 있을까. 김혜수를 떠올리면 드는 생각이다. 서른 일곱 나이에 스무 해 넘도록 ‘스타’로 살아 온 배우. 그녀 앞에선, 굴곡이라는 단어도 굽은 획을 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김혜수는, 생의 불균형이 느껴지는 배역 속에 스스로를 ‘구겨 넣고’ 있다.
29일 개봉하는 <열한번째 엄마> (감독 김진성)에서도 핏기가 가신 피폐한 얼굴이다. 성숙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규정짓기 힘든 초점으로 응축해 가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 응결점이 차가울 정도로 낮다는 것이, 이 배우가 풍기는 아이러니한 매력이다. 열한번째>
#결핍, 새로움을 향한 에너지
1990년대 김혜수는 생기발랄함의 대명사였다. 문학적 뉘앙스가 강한 작품이건 트렌디한 소품이건, 그녀가 출연하면 밝은 에너지가 넘쳤다. 그러나 <얼굴 없는 미녀> , <바람피기 좋은 날> , <좋지 아니한가> 등 최근 그녀가 선택한 배역에는 모두 어떤 ‘결핍’이 느껴진다. 좋지> 바람피기> 얼굴>
“전 결핍이 많아요. 너무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해서… 일상성,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TV에 비친 이미지와 달리, 김혜수의 화법은 농밀하다. 깊이 잠기는 목소리로 추상적 단어를 비교적 많이 섞는 대화를 따라가려면, 약간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인 김혜수가 느끼는 결핍이 시나리오 선택에 배경이 되느냐고 묻자, 답이 한층 더 깊어졌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배우로서 의식이 진지하고 자유로워진 것이 사실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후 주변과 편안하게 소통하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쓰리-메모리즈> 는 내면의 의식이 변하고 있던 순간 찾아온 작품이랄까… 어떤 역할을 고집하기보다는, 어떤 배역을 맡든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보고 싶어요.” 쓰리-메모리즈>
중심부보다 주변부의 인간, 표정보다는 무표정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 캐릭터들은 그래서 그녀 앞에 놓인 도전의 영역인 듯했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이 부질없게 느껴질 법한 22년차 배우. 까치집 머리에 츄리닝 차림이거나, 불치병에 걸린 창백한 얼굴이 그래서 그녀에게 퍽 어울려 보인다.
#규격, 김혜수의 형(形)과 질(質)
김혜수의 가장 치명적 약점은, 그녀가 대중에게 너무 친숙하다는 점이다. 안성기처럼, 그녀도 김혜수라는 ‘규격’ 속에 캐릭터를 가둬 버린다는 지적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그 아픈 부분을, 다시 한 번 건드렸다.
“한때 (그런 지적을 받고) 배우로서 굉장히 큰 문제가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배우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 않을까요? 자기를 버리고 전혀 다른 캐릭터에 동화돼 창조하는 배우도 있겠지만, 배우 자신의 존재감으로 관객을 장악하는 배우도 있어요. 둘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기준이 있을까요?”
배우로서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이미 지겨운 듯했다.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도록 연기하는 방식, 연출가의 의도를 철저히 따라가는 방식 등 여러 시도 끝에 김혜수가 얻은 결론은 “100% 다른 인물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이번 영화에서도 그녀는 캐릭터의 존재에 ‘가공된’ 자신을 입히기보다, 배우 ‘김혜수’로부터 영화의 캐릭터를 퍼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피폐하고 드라마틱한 캐릭터를 구현하는 데 여러 방법이 있어요. 실제 그런 사람을 면담할 수도 있고, 다큐멘터리를 구해 볼 수도 있고…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스스로 그런 감정 속으로 저를 몰아넣어 갔어요. 우울하고, 예민하고, 까칠한 감정 속으로. 물론 괴로웠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봐요. 관객들도 그런 김혜수를 알아보실 거라고 생각해요.”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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