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으로 취임한 이듬해 제 2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은 너무도 단단했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킬로 이상 줄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87년 12월 1일 45세의 나이로 이병철 선대 회장으로부터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아 93년 신경영을 선포하기 직전까지의 심경을 고백한 대목이다. 다음달 1일 취임 20주년을 맞는 이 회장의 고뇌가 이에 못지 않을 것 같다. 그룹이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은 '올스톱' 상태다. 다음달 5일로 예정된 이 회장 취임 20주년 기념식 및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은 취소됐다. 조만간 마무리해야 할 내년 경영계획은 손도 못대고 있고, 당초 연말까지 사장단 인사를 통해 분위기를 일신해 신년 초부터 창조경영에 전력투구, 초일류 기업으로 한단계 더 도약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지난 20년간의 국내에서나 알아 주던 '가전 업체 삼성'을 첨단 '글로벌 일류기업' 삼성으로 끌어올린 이 회장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사실 오늘날의 삼성은 이 회장의 '웅대한 포부'와 미래를 내다본 '뛰어난 선견력' 덕분에 가능했음을 부인키 어렵다.
그는 한국사회의 의식이 우물안 개구리 수준에 불과하던 취임 초기부터 "전국체전에서 1등 했다고 자랑하지 마라. 세계 제일이 아니면 앞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선진국 소비자에게 천대를 받는 제품에 삼성이름을 붙이려면 차라리 이름을 반납하라"고 외쳤다.
"마누라, 자식빼고 다 바꾸라"는 93년 신경영의 화두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외환 위기 직전에는 "잘 나갈 때일수록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준비경영'을 강조해 삼성의 외환위기 극복을 가능케 했다.
21세기 들어서는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경영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강소국론' 등으로 한국경제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올초에는 중국과 일본에 낀 한국경제 '샌드위치론'을 설파, 큰 파장을 낳았다.
고비 때마다 빛을 발한 이 회장의 혜안과 치열한 노력 덕분에 삼성의 덩치는 지난 20년간 140배나 불어났다. 87년 2,700억원에 불과하던 이익규모도 지난해 14조원을 넘었다. 국내 총생산의 18%, 수출의 21%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하지만 삼성의 공룡화가 진전될수록 반(反)삼성 감정도 커졌다.
특히 최근에는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폭로를 계기로 비자금, 경영권 불법승계, 로비 의혹 등에 대한 검찰 수사 및 특검을 받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 어쩌면 이 회장 자신도 이번에는 수사를 피해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 회장은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지난해초 사재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부당이익이라는 시민단체들의 비판을 의식, 이를 사회에 환원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또다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편법, 불법 시비가 불거지면서 "삼성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다.
때문에 이에 답하지 않고는 오늘의 삼성의 위기를 넘기기가 어렵다는 데 이 회장의 고민이 있다. 더욱이 경영권 상속문제는 기업인이라면 양보하기 어려운 아킬레스컨이다.
이 회장은 신경영 때나 외환 위기 때나 늘 근본적인 해답을 내놓았다. 논객 강준만(전북대 교수)는 이 회장을 "업(사안)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경영자"라고 평가했다. 때문에 이 회장이 작금의 난국을 돌파할 어떤 카드를 내놓을 지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남들보다 적어도 10년은 멀리 내다보는 경영인이다. 오늘의 삼성 위기를 넘어 기업체질을 한단계 도약시킬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에 고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진용 기자 hu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