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씨의 학력위조 파문이 우리 사회를 휩쓸던 올 여름, '공상허언증(空想虛言症)'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용어가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자기가 만든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신씨의 병적 심리상태를 묘사한 말이다.
예일대 박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본인만 끝까지 학위를 증명하겠다고 미국을 오간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런 경우는 거짓말 탐지기로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확신과 최면이 워낙 강하고 그에 따른 역학모델을 치밀하게 연기하는 만큼, 주변의 의심을 사는 일도 거의 없다.
▦ 공상허언증 이상으로 복잡하고 심각한 정신질환에 '뮌하우젠 증후군'이 있다. 병이 없는데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자해를 일삼는 질환으로, 성장기에 과보호 혹은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서 발견된다고 한다. 뮌하우젠은 허황된 얘기를 일삼는 등 허풍이 심했던 18세기 독일의 귀족이다.
그가 쓴 소설에 착안, 1951년 미국의 정신과 의사 리차드 아서가 병명을 만들었다. 발견도, 치료도 어려운 이 병의 위험성은 가족이나 애완동물을 일부러 아프게 해 자신의 보호본능을 대리 만족하는 경우에서 드러난다.
▦ 얼마 전 미국의 경영전문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는 '직장의 뮌하우젠'을 조심하라는 기사를 실었다. '팀원 A가 너와 일하기 싫어한다'는 식으로 몰래 동료나 부하를 이간질하거나 갈등을 조장해놓고 자신이 해결사로 나서 문제를 푸는 척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내용을 모르는 상사나 동료들은 당연히 그의 능력을 높이 산다. 하버드>
그러나 그런 정신병적 행태가 조직의 자원과 사기를 떨어뜨리고 생산성을 갉아먹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자기를 과시ㆍ과신하면서 조직 내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증상을 의심해볼 만하다.
▦ 지금 나라의 근간이 되는 두 축에서 거대한 진실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BBK의혹 공방은 정치권력의 향배와 직결돼 있고, 삼성의혹 논란은 한국 최대 경제권력의 운명과 연결돼 있다. 파이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게임에 참여하는 세력도 다양하고 목소리도 높다.
근데 이들 중 적잖은 무리에서 뮌하우젠 증상이나 공상허언증 징후가 발견된다. 스스로 내뱉는 말의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분별력을 잃고, 툭하면 국민과 역사를 앞세운다. 그런 환자들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이상한 나라에서 노망을 앓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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