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순 지음 / 하늘재 발행ㆍ244쪽ㆍ9,800원
이 장편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신헌법 하에 긴급조치가 발동됐던 때가 1974, 75년이니 소설가 남상순(44ㆍ사진)씨의 당시 나이는 초등학교 5학년인 주인공 ‘나’와 거의 같았으리라.
하여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과 무관치 않으리라 여겨지는 이 소설은 92년 등단한 남씨가 ‘오늘의작가상’ 수상작 <흰 뱀을 찾아서> (1993)와 <나비가 어떻게 앉는가> (1995) 이후 오랜만에 내놓은 장편이다. 그 사이 남씨는 첫 작품집 <우체부가 없는 사진> (2003)과 동화 및 청소년 소설 1권씩을 내놓기도 했다. 우체부가> 나비가> 흰>
시골마을 ‘하느물’을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은 내용에서 두 가지 결이 느껴진다. 하나는 ‘그 분’이 독재하던 유신 시절의 정치 상황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갖가지 사연과 전설을 품은 마을의 명물 동백나무에 관한 것이다.
두 층위의 서사의 대표격인 ‘그 분’과 동백나무는 처음부터 갈등관계에 놓인다. 마을에 곧 ‘그 분’이 방문하리란 풍문이 돌면서 ‘뿌라따나스’를 가로수로 선호하는 ‘그 분’의 취향을 헤아려 동백나무를 베어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마을 주민들은 꺼림칙해하지만 하급 공무원-이장-면장-군수로 이어지는, 선물 공세를 앞세운 설득 작업에 넘어가고 만다.
나무 베는 일을 한사코 반대하던 대학 휴학생 현규는 어딘가로 끌려가 실종된다. 밑둥만 남은 채 죽어가는 동백나무 옆을 지키는 것은 ‘나’의 동급생 두섭. 떠돌이 광녀(狂女)가 낳고 마을 무당이 거둬 키운, 좀 모자란 듯한 이 아이는 나무를 살리겠다며 흙을 돋우고 물을 뿌린다.
두섭은 ‘나’에게 말한다. “키도 크지만, 나이도 많고 가지도 많고 꽃도 무지하게 많아 새들도 버글거리잖아. … 저 위의 그분보다도 나는 저 동백나무가 더 높다고 생각한다.”(176쪽) 애쓴 보람 없이 말라가는 나무를 보며 두섭은 제 생명을 투입하는 마지막 헌신을 감행한다.
동백나무의 무성한 가지처럼, 아기자기 다종한 이야기들을 엮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소설의 흡인력을 보장한다.
제왕적 지도자의 이치에 닿지 않는 ‘정치적 상상력’에 휘둘리는 서민들의 처지를 정색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짚어내는 희극적 수법이 세련되다. ‘굽질리다’ ‘수꿀해지다’ 등 풍성하게 살려낸 고유어도 읽는 맛을 더한다.
정치적 풍자와 물활론적 세계관을 각각 담은 이야기의 두 결이 밀착되지 못해, 애초 기획했을 이야기의 큰 울림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점은 못내 아쉽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