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종로 거리나 명동 같은 번화가를 걸어가면 단 5분이 못되어서 눈이 어지러워진다." "시민들이 거리에 울긋불긋 무질서하고 난잡하게 붙어있는 광고 때문에 광고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다.
건물 전면을 뒤덮다시피 해놓아 서울은 마치 '간판도시'처럼 돼버렸다." "온 나라가 간판과 구호로 덮였다. 도시에 있는 집들의 앞 쪽은 문턱에서 지붕 끝까지 무질서한 그림과 글의 뒤범벅이요, 거리는 구호와 현수막의 비빔밥이다."
'세계 최악'이라는 한국의 간판문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다. '간판밀림' '간판공해' '간판도시' '간판공화국' 등과 같은 표현이 수시로 신문에 등장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가? 위에 소개한 3건의 비판은 최근의 것이 아니다. 차례대로 각각 1959년, 1965년, 1974년의 신문에 등장한 것이다.
● 간판에 의존하는 자영업 과잉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달라진 건 없다. 2001년엔 "서울을 비롯한 시가지 상가 간판들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진적인 한국의 간판 문화, 이젠 메스를 대야 할 때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메스를 대는 게 불가능했던가 보다. 올 6월 수필가 정연순씨는 "판자촌은 우리 근대사의 질곡의 한 단면이다"라며 "나는 요즘 거리에 나서면 신 판자촌에 들어선 기분이다. 서울은 간판, 간판, 간판의 도시다"라고 개탄했다.
반세기 넘게 계속 반복돼 온 간판 비판! 그러나 달라진 건 없다. 왜 그럴까? 미학적으로만 대응하지 말고 정치경제적 구조와 사회심리적 배경에 주목해보자. 가장 큰 이유는 광고.홍보를 간판에만 의존하는 자영업 과잉이다.
한국 노동시장은 자영업주와 무급 가족 종사자 등 비임금 근로자 비중이 전 산업에 걸쳐 37.6%에 달한다. 이는 미국 7.4%, 독일 11.0%, 영국 12.2%, 일본 15.9%, 대만 23.6% 등에 견주어 매우 높은 수치다.
게다가 간판 의존도가 높은 도.소매, 음식.숙박업, 개인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거니와 증가 추세다. 이익을 내는 자영업자의 수는 전체의 10% 미만이기 때문에, 간판 경쟁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필사적인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이 가세한다. 건물 임대기간이 짧고 공급자가 큰 힘을 쓰는 '공급자 시장'인지라, 자영업자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게 어렵다. 간판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는 이유다.
한국사회의 변화속도와 유행 추종도가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점도 업종의 잦은 변경과 그에 따른 간판 교체를 초래해 간판의존도를 더욱 높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소 체계가 엉망인 점도 '간판의 주소화' 기능을 높여 간판의 요란스러움을 부추긴다.
이 모든 걸 증폭시키는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으니, 그건 바로 크게 외쳐야만 귀를 기울여주는 소통 문화, '개인'보다는 가문.고향.학벌 등 '소속 집단'의 간판 파워로 개인을 평가하려는 집단주의 문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중시 여기는 과시주의 문화 등이다.
자영업자들의 간판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당.정치인들의 대민(對民) 선전 행위에서부터 대학.대학생들의 캠퍼스 내 홍보 행위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을 기준으로 삼건 자영업자들의 간판에 돌을 던질 수준이 못 된다.
10년 전 "우리 학교는 촌지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입간판을 학교 교문.교무실 앞에 내걸게 했던 교육행정의 수준을 상기해보라. 학교 간판 등급제는 어떤가?
● 포지티브방식 등 타개책 모색을
그래서 "간판문화, 이대로 좋다"를 역설하려는 게 아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수백 건 이상 쏟아져 나온 당국의 간판 규제.단속 조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던 이유를 성찰해보면서, '네거티브' 일변도로만 가지 말고 '포지티브' 방식도 병행하는 등 좀더 슬기로운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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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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