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은 재빨리 싱크대로 뒤어가 안경을 벗고 눈을 씻었는데, 튀어나온 산의 일부는 팔뚝으로 흘러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15쪽) 발화성 물질이 깔려 있어 언제든 화재와 폭발이 도사리고 있는 화학 실험실은 털끝만큼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서 스승과 제자들은 가족보다 끈끈한 연대감으로, 무더위와 한파를 이겨냈다.
진정일(65)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를 위해 제자들은 자신의 수첩에서 꺼낸 기억들을 모았다. 냉난방은 꿈도 못 꾸고, 실험 기자재와 독극물이 뒹구는데 학생들은 분주하기만 했던 옛 실험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불러 낸다. ‘고분자 화학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는 실험실에서 1년 365일을 살다시피하다, 8월 정년을 맞은 스승에게 37명의 제자가 바치는 별난 선물이다(양문 발행).
“나이가 들어갈수록 스승은 제자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터득했다.(61쪽)” 대학에서 33년 동안 강단에 섰고, 4,000명에 가까운 학부생과 150여명의 박사 과정생을 배출한 진 교수의 실천적 교육론이다.
“함께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제자가 내 가방을 자기 가방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도저히 못 이겨 보냈더니, 이틀 뒤에야 겸연쩍은 얼굴로 내 가방과 술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토요일 밤 늦도록 실험을 하다 실험실에서 잔 대학원생을 깨우려니 ‘야, 새끼야! 나, 깨우지 마! 조금 더 잘래!’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현재 회사 중역으로 있는 제자의 과거다.
1996년 이 곳에서 석사과정 밟고 현재 버클리대 로렌스 국립연구소 포스닥으로 있는 홍영래씨는 “선생님은 ‘공부 좀 해라. 이 저널 좀 봐!’라며 내 연구와 관련되는 논문을 챙겨주셨다”고 기억했다. 함께 밤 새며 먹은 야참의 꿀맛은 덤이다.
하루 종일 서서 실험하고 데이터 하나를 얻기 위해 전국을 뛰어다니면서도 학생들은 이제 중역이 됐다. 제자 유영준(이스라엘 테크니온연구소 포스닥)씨의 말은 이 시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험실의 시간을 바탕으로 나아간다면 눈앞의 시련이나 굴곡쯤은 거뜬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머잖은 옛날, 고려대 고분자화학 연구실은 이 시대에 많은 발언을 한다. 9월 15일, 함께 모인 70여명의 제자들은 행사를 연례화할 생각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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