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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전/ 24일 개막…네덜란드 두 미술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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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전/ 24일 개막…네덜란드 두 미술관을 찾아서

입력
2007.11.22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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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작품 최다 소장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1973년 암스테르담에 개관한 반 고흐 미술관은 대부분의 소장 작품들을 반 고흐의 가족들로부터 영구 대여받았다.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는 아들에게 형과 똑같은 이름 빈센트를 붙여주었는데, 그가 1960년대 삼촌의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네덜란드 정부에 소장 컬렉션을 영구 대여해줬다.

국립 반 고흐 미술관은 건물 보수 유지와 기본적인 컬렉션 관리를 위해 매년 정부로부터 정기 보조금을 받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입장료 수입으로부터 얻는다. 스폰서와 복권 기금 등으로는 매년 새로운 작품들을 구입, 컬렉션을 확장하고 있다.

73년 문을 연 메인 빌딩 2~4층에 반 고흐의 상설전시장이 들어섰으며, 2층에 전시된 유화들은 초기 네덜란드작부터 후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의 작품까지 시기별로 나뉘어 걸렸다.

99년 증축한 전시동은 특별 기획전을 주로 여는데, 올 여름에는 리노베이션을 위해 문을 닫는다. 내년 초에는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 밀레이의 특별전이, 가을에는 렘브란트 재단 창립 125주년을 기념하는 '렘브란트 대표작 125선'전이 열릴 예정이다.

● 얀센 큐레이터·쿠츠펠트 부관장/ "고흐를 향한 한국인들 열정에 대한 보답"

"반 고흐의 대표작들만 모은 서울 전시는 그에게 열광적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보답입니다. 최고의 컬렉션으로 구성된 최고의 전시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난 릭 반 쿠츠펠트 부관장과 레오 얀센 회화 담당 큐레이터는 "이런 좋은 전시를 한국에 선보일 수 있게 돼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과 나란히 미술관광장(Museumplein)에 자리잡은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가 그린 200여점의 유화와 600여점의 드로잉을 갖고 있는 세계 최대의 반 고흐 작품 소장처. 유럽과 미국은 물론 중국 홍콩 싱가포르 호주 남아프리카까지 세계 각지에서 작품 대여 요청이 쇄도하는 곳이다.

반 고흐 미술관은 이번 한국전에 미술관 웹사이트의 메인 화면으로 사용하고 있는 밀짚모자를 쓴 반 고흐의 '자화상'과 노란 배경과 남보라색 붓꽃의 보색 대비가 눈부신 '아이리스' 등 유화 대표작 22점에 드로잉 1점과 판화 1점 등 총 24점을 보낸다.

얀센 큐레이터는 "'자화상'과 '아이리스'는 '해바라기' '아몬드 꽃나무' '침실' 등과 함께 반 고흐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작"이라며 "외국에 잘 대여해주지 않는 이 작품들이 한국에 가는 건 아주 특별하고 드문 경우"라고 말했다.

1973년 설립된 이후 연간 150만명이 찾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방문객의 80% 이상이 외국인일 정도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짧은 기간 안에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자리잡은 비결을 묻자 반 쿠츠펠트 부관장은 "매우 독창적인 예술가였던 반 고흐가 바로 그 비결"이라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를 근대적 예술가의 전형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매우 높은 수준의 예술작품과 비극적 생의 결합이 근대 예술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반 고흐는 19세기에 20세기 회화의 포문을 연 화가였다. 얀센 큐레이터는 "반 고흐는 표현주의와 포비즘(야수파 운동)의 시조로 미술사의 전환점에 있는 예술가였다"며 "그가 색깔을 사용한 방식이나 재료를 다루는 방식 등은 아카데믹하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새롭고 개인적인 스타일이었다"고 설명했다.

"19세기의 대중과 컬렉터들이 원했던 전통적인 풍경화와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새롭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적이고 감정적인, 그래서 알아들을 수 없는 새로운 언어였죠."

일곱 차례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반 쿠츠펠트 부관장은 "서울시립미술관은 주변 고궁과 가로수길이 환상적인 아주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며 "반 고흐의 작품이 아시아에서 선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 만큼 좋은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끽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유명 작품 2만여점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국립공원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꿈의 미술관'을 짓고 싶다는 기업가 부인 헬렌 크뢸러 뮐러의 소망에 따라 처음 구상됐다.

그러나 1920년대 세계 경제가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면서 미술관 건립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20세기 최대의 개인 소장 컬렉션을 가진 헬렌은 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썩힐 수는 없다는 생각에 1935년 네덜란드 정부에 미술관을 지어줄 것을 조건으로 싼 값에 작품들을 기증하고, 3년 후 개관한 크뢸러 뮐?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맡았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소장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유럽에서 가장 큰 조각공원을 갖춘 미술관으로도 유명하다.

25㏊의 야외공간에 오귀스트 로댕, 장 뒤뷔페, 헨리 무어를 비롯해 마르타 판, 데이비드 내시, 이우환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보석처럼 곳곳에 박혀있다.

총 1만9,000여점의 소장 작품 중 드로잉, 에칭 등 종이작품이 1만1,000점, 조각작품이 1,700점, 반 고흐를 비롯해 피카소, 르느와르, 모네, 몬드리안 등 유명화가들의 페인팅이 2,000점가량 된다.

그러나 미술관의 심장은 역시 반 고흐 상설전시장으로, 많은 방문객들이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먼 숲 속까지 미술관을 찾아온다.

● 리즈 크레인 수석 큐레이터/ "대여요청 쇄도 '슈퍼 A급' 작품 보내요"

“이번에 한국에 보내는 반 고흐의 작품들은 ‘수퍼 A 컬렉션’이에요. 그가 예술가로서 어떤 작업을 했는지 직접 보며 좋은 인상을 받기를 바랍니다.”

암스테르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 오텔로의 ‘드 호흐 펠류어’ 국립공원 안에 자리잡은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이번 서울 전시에 반 고흐의 유화 22점과 초기 드로잉 20점 등 총 42점의 작품을 보낸다.

유화는 소장하고 있는 87점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로,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을 비롯해 ‘씨 뿌리는 사람’, ‘우체부 조셉 룰랭’, ‘피에타’ 등 대표작이 대거 포함됐다.

리즈 크레인 수석 큐레이터는 “우리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을 실망시켜선 안되기 때문에 한꺼번에 대표작 여러 점을 동시에 빌려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면서 “특히 ‘프로방스의 시골길’ 같은 ‘수퍼수퍼수퍼 A급’(웃음) 작품은 대여 결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크뢸러 뮐러 미술관을 찾은 방문객은 27만5,000명이었습니다. 그 중 30% 정도가 미국과 아시아에서 찾아온 외국인이었고요.”

그는 “미술관을 찾아 멀리서 오는 관람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해외전시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반 고흐 미술관과 늘 대여작품 선정을 협의하고 있다”며 “서울전은 네덜란드에선 비수기에 해당하는 겨울철에 열리는 전시라 특별히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내줄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크레인 큐레이터는 “거의 매일 세계 각지로부터 작품 대여요청을 받는다”고 했다. 세계는 왜 그렇게 반 고흐에 열광할까.

“여러 측면이 있어요. 시각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작품이 매우 표현적이어서 세계 어느 관람객에게나 직접적으로 그 의미가 전달된다는 게 매력이죠. 또 하나는 이 가난했던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이 영화나 소설, 책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거예요. 아주 내밀하고 사적인 부분들을 알게 되면서 작품 이면까지 더 잘 이해하고, 좋아하게 된 거죠.”

반 고흐 미술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반 고흐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1920년대 광산업과 선박업으로 큰 부를 이룬 기업가 안톤 크뢸러 뮐러의 부인 헬렌(1869-1939)의 소장품들을 모은 미술관이다.

“반 고흐는 눈이 밝았던 헬렌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였어요. 그녀는 반 고흐의 미술사적 중요성과 의미를 알아봤던 첫 번째 컬렉터 그룹에 속합니다. 당시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몬드리안 같은 작가를 눈여겨봤던 것도 헬렌이었어요.”

덕분에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반 고흐뿐 아니라 몬드리안, 피카소, 르느와르, 모네 등 다양한 시기의 작가들을 두루 만날 수 있는 품이 넓은 미술관이 됐다.

크레인 큐레이터는 한국 관람객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눈으로 본 것을 편하게 즐기라”고 조언했다. “반 고흐의 그림은 매우 직접적으로 다가와 그저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반 고흐를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니 천천히 감상하면서 마음껏 즐기세요.”

글·사진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마지막 불꽃' 피운 오베르 쉬르 우아즈

비 갠 11월의 청명한 날, 프랑스 파리 북역. 파리 근교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 지역으로 향하는 교외선 기차 RER에 오른다. 한 시간쯤 북쪽으로 달려 도착한 곳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생의 최후의 나날을 보낸 작은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맹렬했던 생의 마지막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 반 고흐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오베르

반 고흐는 1890년 5월 20일부터 자살을 시도한 7월 27일까지 이곳에서 79일을 살며 80여점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던 오베르 시절은 '불꽃은 꺼지기 직전 가장 화려하게 타오른다'는 말을 오롯이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작고 한적한 기차역을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담벼락 안내판에 인쇄된 반 고흐의 그림 '도비니의 정원'. 담 안쪽은 인상파 선배화가 도비니가 실제 살던 정원이다.

도비니 정원 맞은편엔 '오베르 시청', 그 건너편 골목엔 다섯 명의 마을사람을 그려넣은 '오베르 계단', 언덕길을 올라가면 '오베르 교회', 그 위로는 '오베르 밀밭'과 '오베르 성'…. 반 고흐의 도시로 이름을 알린 오베르엔 작품의 배경이 된 곳마다 실물과 그림을 비교할 수 있게 작품을 인쇄한 안내판이 붙어있다. 작품과 고스란히 겹치는 풍경 속을 걷노라니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환각에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 반 고흐의 작은 방, 텅 빈 의자

도비니 정원에서 50걸음쯤 더 걸으면 '오베르주 라부(Auberge Ravoux)'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쓰인 3층짜리 흰 건물을 볼 수 있다.

반 고흐가 세 들어 살았던 라부 여관이다. 반 고흐가 죽은 후 오랜 세월 호텔 겸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 1985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되면서 생전의 모습대로 복원됐다.

1층은 라부가 운영하던 당시의 카페처럼 꾸며졌고, 2층은 기념품점,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그제야 꼭대기층 왼편에 반 고흐가 숨을 거둔 다락방이 보인다.

오베르 밀밭에서 권총으로 제 가슴을 쏜 화가는 철철 피를 흘리며 계단을 올라 침대에 누워있다가 이틀 후 천상으로 떠났다.

"면적 7㎡인 이 작은 방은 당시 오베르에서 가장 싼 방이었어요. 하루에 3프랑밖에 안 했으니까요." 젊고 예쁜 여성 가이드가 다가와 소곤소곤 설명한다.

가난이 유일한 자산이었던 불운했던 예술가의 방엔 이젠 그가 사용했던 작은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작품 둘 곳이 없어 침대 밑에 쌓아두었다는 그 작은 방. 천장으로 난 작은 창이 빛을 들이느라 안간힘을 쓴다.

◆ 반 고흐, 동생과 함께 잠들다

반 고흐의 묘지로 올라가는 언덕길은 온통 추수가 끝난 밀밭이었다.

반 고흐가 이젤을 짊어지고 잰걸음으로 풍경 사냥을 다녔을 까마귀 까악까악 울어대는 길. 늦가을의 하늘은 키가 작고, 물기 머금은 단풍은 현란하다. 그대로 반 고흐의 밀밭 그림이다.

오베르 공동묘지의 입구를 두리번거리는데 트럭에 앉은 젊은 운전수가 "방 고흐?" 하고 대뜸 묻는다.

이곳에 오는 상당수가 성지순례 하듯 반 고흐의 발자취를 찾는 관광객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걸으니 왼쪽 담장에 머리를 뉘이고 있는 가장 낮고 초라한 두 개의 묘가 나온다. 반 고흐와 그의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의 묘다.

다정하게 한데 몸을 뉘인 두 형제는 묘지마저도 가난했다. 자살한 사람이라고 오베르 교구의 신부가 장례미사마저 거부, 십자가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죽어서라도 외롭지 말라고 누군가 바친 해바라기가 마치 그곳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라는 듯 놓여져 있고, 관광객들이 놓고 간 편지들은 가을바람에 팔랑거린다.

반 고흐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테오는 정신착란으로 정신병원에 입원, 불과 6개월 후인 1891년 1월 생을 마쳤다.

"제 인생은 테오와는 달리 고독 속에서 막을 내리겠죠. 아마도 제게는 따뜻한 가정을 갖는 일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 고흐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속 구절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23년 후인 1914년, 네덜란드에 묻힌 남편의 유골을 이곳으로 이장, 시아주버니에게 남편을 양보했다.

묘지에서 나와 내려가는 길, 검은 코트를 입은 목사가 이끄는 장례행렬과 맞닥뜨렸다.

길가로 비켜서는데 가슴이 쿵. 꽃으로 가득한 영구차 뒷창으로 보이는 영정 속 얼굴이 너무 앳되다. 조용한 흐느낌 속에 느릿느릿 언덕길을 오르는 운구행렬에 1890년 7월 30일의 풍경이 겹쳐진다. 뙤약볕 아래 반 고흐의 곤했던 육신을 짊어졌을 테오와 베르나르, 피사로, 룰랭…. 반 고흐가 오늘날의 때늦은 영광을 헛되다 조소하지 않기를. 모두가 그곳에서 편히 쉬기를.

■ 반 고흐의 사람들

반 고흐만큼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포개지는 예술가도 흔치 않다. 모델 구할 돈이 없어 늘 주변 사람들을 그렸고, 그래서 그의 작품엔 늘 사연이 서려있다. 쉽게 화내는 괴벽스런 성격 탓에 늘 외롭게 지냈지만, 그처럼 인간의 온기를 갈구한 예술가도 없었다.

◆동생 테오 반 고흐(1857-1891)

반 고흐의 예술세계를 가능하게 했던 유일한 후원자이자 영혼의 동반자. 화랑의 딜러로 일하며 버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형의 생활비를 대며 그림을 계속하도록 독려했다.

고통과 희열이 소용돌이치는 반 고흐의 내면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668통의 편지 덕분에 오늘날에 전해졌다.

반 고흐의 자살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생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안목 높은 화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테오는 인상파 그림이 팔리지 않자 화랑으로부터 매입권한을 제한받게 되고, 결혼 후 낳은 아이가 병에까지 걸리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림을 그리느라 너에게 너무 신세를 졌다는 채무감과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이런 감정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편할까.” 반 고흐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 빈센트가 가난 속에 심하게 앓는 것을 보고 며칠 후 권총으로 자살했다.

◆창녀 시엔(1850-1904)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여인의 누드를 그린 초기 대표작 ‘슬픔’의 주인공. 여인을 향한 반 고흐의 사랑은 항상 비참하게 거부됐으나, 매독에 걸린 채 임신한 창녀 시엔만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돼줬다.

그러나 반 고흐는 가족들의 반대로 시엔과 그녀의 자식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시엔은 반 고흐 사후 물에 빠져 자살했다.

◆폴 고갱(1848-1903)

반 고흐가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아를로 내려가 ‘노란 집’에 기거할 때 유일하게 반 고흐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지냈던 화가.

경쟁과 조언을 반복하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던 두 사람은 예술에 관한 견해차로 심하게 다투고, 반 고흐는 고갱이 집을 나가버리자 홀로 남을 두려움에 떨다 면도날로 자신의 한쪽 귀를 잘랐다.

‘해바라기’와 ‘아를의 방’, ‘고갱의 의자’ 등이 고갱과의 우정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우체부 룰랭 요제프(1841-1903)

반 고흐가 아를에 머물던 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유일한 친구. 고갱과 결별 후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동네사람들은 미치광이로 몰아 감금하려 했으나, 룰랭의 가족만이 끝까지 그를 돌봐주었다.

반 고흐는 그와 그의 아내, 아들 등 모든 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가셰 박사(1828-1909)

반 고흐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오베르에서 믿고 의지하던 의사. 예술에 대한 안목이 높아 외로운 반 고흐의 정신적 친구가 되었고, 그러나 반 고흐가 가셰의 딸 마르그리트에게 사랑을 느껴 가까이 지내자 냉정하게 돌변, 반 고흐 자살의 한 동기가 됐다.

반 고흐는 가셰와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를 여러점을 그렸다. 마르그리트는 7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은둔해 살았다.

◆요한나 반 고흐 본헤르(1862-1925)

테오의 아내. 반 고흐의 사후 친척들은 모두 그의 작품을 가치 없는 짐으로 여겨 불태워버리려 했으나, 제수인 요한나가 보존, 후세에 반 고흐의 작품세계를 알렸다.

요한나는 전시회를 열고 책을 출판하는 등 각고의 노력으로 반 고흐 사후 10년 만에 그의 이름을 위대한 천재의 동의어로 만들었다.

글·사진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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