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한 생애를 보낸 함형수(1914~46)라는 불우한 시인이 있다. 그는 한때 학생운동에 가담했고 1936년에는 동인지 <시인부락> 을 창간하기도 했으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표시로는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이 꼽힌다. 해바라기의> 시인부락>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를 세우지 말라./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전문)
● 전설 같은 예술적 순교자
이채로운 목소리로 우리 시문학에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시의 부제는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다. 노란 해바라기와 보리밭, 무덤, 태양, 꿈, 그리고 부제를 보면 이 시는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90)의 꿈과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청년>
반 고흐가 자살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우리 시의 모티브로 등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 함형수가 반 고흐처럼 정신착란증으로 숨졌다는 사실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반 고흐는 정신질환 속에 권총 자살했으며, 그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테오 역시 형이 세상을 뜬 지 6개월 만에 정신착란으로 숨졌다.
두 형제는 밀밭과 해바라기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나란히 묻혔다. 생전에 작품이 팔리지 않았던 반 고흐의 쓸쓸함, 이와 대비되는 열정적이고 눈부신 예술세계, 형제의 죽음 등이 함형수의 옛 시에 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숙연한 느낌을 준다.
반 고흐 전시회가 24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기는 했지만 예술적 순교자로서 성인과도 같았던 반 고흐는 오랜 기간 우리에게 전설적인 화가였다.
그의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삶이 미술 애호가의 가슴을 적시고, 사후 작품 가격이 세계 경매시장을 깜짝 놀라게 해도, 정작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제대로 보여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학원에서 3개월 동안 공부한 외에, 공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함형수가 노래한 해바라기 그림도 그가 독학을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물이다.
작은 꽃병과의 비례는 아랑곳 없이 휘황하게 불타 오르는 한 무더기의 큼직큼직한 해바라기들은, 예술에의 열망과 생명에의 감동으로 보는 이에게 큰 기쁨을 선사한다.
인상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의 많은 걸작들은 태양이 작열하는 남 프랑스 아를, 요양원이 있던 생 레미,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오베르에서 다수가 그려졌다. 이번 출품작들 중에서는 <자화상> <아이리스> <씨 뿌리는 사람> <우편배달부 룰랭> <노란 집> 등이 중요하게 꼽힌다. 노란> 우편배달부> 씨> 아이리스> 자화상>
그가 죽은 후,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가 입고 있던 옷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작업에 내 생명을 걸었다. 이성은 그 속에 반쯤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라는 문구가 긴 여운을 남긴다.
고뇌와 정신착란 속에도 자신을 명료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던 이 위대한 화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절망에 지쳐 자살한 뒤 그가 제대로 평가되고 유명해지기까지는 불과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 사후 몇 달 뒤 쏟아진 극찬
"경이롭고도 강렬한 비전을 보는 이 화가의 뛰어난 본능, 사물의 딱딱한 모습 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형태를 감지하는 예리한 감수성, 웅변과도 같은 표현력, 넘쳐 흐르는 상상력 등은 그의 친구들을 놀라게 한다."
그가 죽은 지 몇 달 후 <레코 드 파리> 지에 실린 평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정확하고 공정하고 날카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이런 극찬은 왜 늦게나 나오는가. 목숨을 바쳐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는 화가에 대해 세상은 왜 그렇게 매정하고 짓궂었던가. 레코>
박래부 논설위원실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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