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미국 월가는 또 하나의 금기를 깼다. 세계적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88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최고경영자(CEO)를 기용한 것이다. 당시 51세였던 스탠리 오닐은 이듬해 4월 회장직까지 꿰찼다.
앨라배마주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으나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10대 때 생산노동자로 입사했던 GM의 배려로 사내 대학과정을 거쳐 하버드대 MBA를 땄다.
1986년 메릴린치로 옮긴 후 승승장구해 16년 만에 CEO에 오른 그는 보란 듯이 주식중개 위주의 사업구조를 과감히 개편, 회사를 선도적 국제 투자은행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4,000만 달러의 연봉과 함께 쏟아졌던 찬사와 관심은 의외의 곳에서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지난 해 메릴린치에 사상 최고의 실적을 안기며 연임했을 때만 해도 '오닐의 시대'는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불행의 싹이 움텄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고수익이 불과 1년 만에 고위험으로 돌변해 올 3분기 서브프라임 부실에 따른 손실만 79억 달러에 달한 것이다. 이사회와 상의 없이 와코비아 은행 인수를 시도하는 등 과잉자신감으로 물의를 빚던 그가 낙마하는 데 결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서브프라임 유령이 오닐에 이어 월가의 또다른 명망가인 찰스 프린스 씨티그룹 CEO까지 덮치자 뉴욕타임스가 최근 흥미로운 분석기사를 실었다. CEO가 '버전 3.0'시대를 맞았다는 것이다.
1990년대를 풍미한 1세대 CEO의 대표적 인물은 GE의 잭 월치,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스너, 씨티그룹의 샌포드 웨일 등 '제왕적 리더십'으로 영토를 확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 기술주 거품 붕괴와 함께 엔론 등 대기업의 회계부정 스캔들이 터지면서 오닐과 프린스처럼 전임자들의 과오를 청산하는 '해결사(fix-it) 리더십'이 부상했다.
▦2세대를 대체한 'CEO 3.0' 세대로는 제록스의 앤 멀케이, 보잉의 제임스 멕너니 등이 꼽힌다. 이른바 '지휘자형 리더십'이다. 다양한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끌어내듯이, 수많은 조직원들이 같은 배에서 함께 일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다.
하버드 예일 등 유수한 경영대학원은 이미 개인 능력을 중시하는 재무ㆍ마케팅 등의 과목을 빼고 팀워크를 중시하는 과목을 배치했다고 한다. 국가나 대기업을 이끄는 리더십이 전환기적 시험대에 올라 있는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고민과 결정의 계절이 깊어간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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