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KY’이란 말이 유행이다. “구키오 요매(空氣を讀め)”를 알파벳 약자화한 것으로 “분위기 파악” 혹은 “분위기 파악 좀 해라”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전통적으로 ‘와(和)’를 받들어 온 일본은 KY를 중시하는 나라다. 숨이 막힐 정도로 복잡 미묘한 일본 사회에서 KY를 못하는 것은 심각한 결격 사유다. 그런데 정작 KY가 필요한 것은 일본인 개인이 아니라 정치지도자들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만큼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정치가가 많기 때문이다.
■ 아베 전 총리의 치명적인 실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대표적이다. 보수ㆍ우익 세력의 적자로 각광받았던 그는 재임 중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당당하게’ 부인함으로써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했다.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도 아닌 미국 정치지도자에게 엉뚱하게 사과해야 했고, 그럼에도 미국 하원이 위안부결의안을 채택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타격을 입게 만들었다.
6자회담에 대한 KY가 안돼 일본 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은 것도 아베 전 총리다. 납치 문제를 지나치게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한 그는 “납치문제 해결 없이 대북지원은 없다”고 선언, 일본의 입지를 스스로 축소하는 악수를 뒀다. 그는 북한을 깡패국가라고 비난하는 등 살기등등했던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권의 기세에 잘못 편승한 측면이 많다.
아베 총리는 물러났지만 납치문제는 원죄처럼 남아 일본을 괴롭히고 있다. 일본 정부는 북 핵과 납치문제는 분리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인식과 납치문제로 분노하고 있는 국민여론 사이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핵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를 적극적으로 이행하고, 이에 따라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빼려는 움직임이 현실화하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일본의 현안이기도 한 북핵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납치문제 해결 전에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면 안된다”며 미국의 바지춤을 붙잡아야만 하는 신세가 됐다.
아베에 이어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가 등장한 것은 일본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9월 취임 이후 후쿠다 총리가 보여준 언행에서 KY가 가능한 현명한 지도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미일동맹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 중시정책’을 주창, 이념적으로 편향됐던 일본의 외교ㆍ안보 정책을 되돌려 놓고 있다. 납치문제에 있어서도 아베의 실수를 바로잡겠다는 자세다.
후쿠다 총리는 미일정상회담 가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과의 협상 방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분위기, 특히 미국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일본이 6자회담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체면을 위해 미국이 만들어 준 제한된 시간을 북한과 충실한 협상에 활용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 현명한 후쿠다 총리에 기대
일본 근대사에서 KY는 국가의 사활을 좌우했다. 메이지(明治)유신으로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근대국가가 되거나,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어 2차대전이라는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KY의 성패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역사적인 경험을 되돌아 보면 일본 정치가들에게 ‘KY!’라고 경고하는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쿄 김철훈특파원 ch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