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얼마 전 고등과학원의 최재경 교수는 우리글에 없는 닿소리를 표기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필자는 최 교수와는 조금 다르지만 역시 세종대왕이 제안한 것처럼 발성기관을 본떠 윗입술 또는 윗앞니 뒷부분 대신 윗앞니 모양을 앞에 붙인 'ㅂ, 'ㅍ와 'ㄷ, 'ㅌ 으로 v, f, th(유성음), th(무성음)를 나타낼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베리 '파인(very fine), '더 '트리 (the three)처럼 쓰면 발음을 쉽고 일관성 있게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과학원을 다녀가는 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한글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이 있다. IBM에서 양자암호와 양자전송을 발명한 베넷 박사는 필자가 만들어준 한 페이지짜리 한글 읽기 매뉴얼을 15분 정도 배우더니, 두 번째 방문할 때에는 길거리 간판을 읽을 수 있었고, 세 번째 방문 때에는 간단한 한글을 쓰기도 했다.
우리글은 이렇게 과학적이고 배우기 쉽지만, 우리말은 어떨까. 세계 여러 나라 말을 배웠다는 한 미국인은 한국말과 아랍어가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대부분의 과학계산용 컴퓨터 언어는 영어로 만들어졌고, 이것으로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영어는 과학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처럼 느껴진다. 어떤 한국인 컴퓨터과학자는 우리말은 왜 이렇게 비과학적일까 한탄하며 우리말의 비과학성에 대한 글까지 썼다고 했다.
필자도 한때 그런 좌절감을 많이 느꼈었다. 하지만 ‘포스트스크립트’라는 컴퓨터 언어를 배우고 나서 우리말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마치 디지털매체에서 문자, 그림, 사진이나 음악을 모두 0과 1로만 나타내듯이, 포스트스크립트는 인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컴퓨터 자판의 글자로만 나타낸다. PDF라는 문서형식도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포스트스크립트는 복잡한 도형을 그릴 수 있도록 과학수식계산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데 다른 컴퓨터 언어와 달리 그 문법이 우리말과 매우 닮았다.
문장 앞부분에 여러 자료들을 나열한 후 동사가 나오면 앞에 나온 필요한 자료들을 묶어 한 동작을 실행한다. 영어처럼 “나 사랑 너”가 아니라 “나 너 사랑”식의 문법이라는 말이다. 컴퓨터언어 중에서도 하드웨어를 직접 컨트롤하는 상당수가 이런 식의 문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도 여전히 문장요소의 순서가 철저히 지켜져야 하지만, 우리말은 순서가 조금 달라지더라도 토씨나 어미변화가 이를 보완해주므로 오류가 생길 확률이 훨씬 더 낮아지는 좋은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나름대로 뇌의 논리구조에 맞게 발전해온 훌륭한 과학성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다만 그 구조가 여태까지 잘 정리되지 않았고, 우리말을 담은 훌륭한 과학기술 특히 정보통신분야가 부족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언어는 그 언어로 담을 내용이 없어지면 사라진다고 한다. 얼마 전 세계특허에 우리말이 인정되게 된 것은 우리나라 특허건수가 많아서이지, 특허 내용에 우리말이 필수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필자는 무턱대고 우리 것이니 지켜야 한다는 국수주의 입장은 아니다. 한글과 우리말이 갖고 있는 과학성을 밝혀 정리하면, 정보통신분야의 과학과 기술을 담을 그릇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여러 관심 있는 분들께 드린다.
김재완 고등과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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