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씨에 될까? 뜬금없이 뚝 떨어진 기온에 오돌오돌 떨며 도착한 시사회장에서 이런 생각부터 들었다. 포스터의 ‘두 명의 살인마가 살고 있는, 우리동네’라는 스산한 문구도 철 지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필름이 돌아가고 몸이 더워지면서, 색다른 스릴러의 깊이에 스르르 빠져들고 말았다.
29일 개봉하는 <우리동네> 는 ‘장르(genre)’라는 영화적 틀의 다양한 쓰임새를 보여준다. 영화는 스릴러라는 장르의 외피를 입고 있다. 살인마가 등장하고 그것의 실체를 파헤치는 서스펜스가 존재한다. 하지만 피칠갑한 시각적 충격이나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는 긴장감을 앞으로 내밀지는 않는다. 긴박한 전개나 허를 찌르는 반전도 없다. 우리동네>
대신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쉽게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관계와 그 관계가 빚어내는 복층적인 감정. 이 작품으로 데뷔하는 정길영 감독은, 여러 겹으로 쌓인 감정을 스크린 위에 부려놓는데 오히려 스릴러라는 원초적 장르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 장르가 인간의 압축된 내면을 담는 좋은 거푸집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영화의 무대는 ‘사초동’이라는 서울 언저리의 가상 동네. “집값도 안 오르고 좀체 변하는 게 없는” 이 동네에서 4건의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여기서 나고 자란 추리소설 작가 경주(오만석)와 살인범을 쫓는 형사 재신(이선균)이 살인범을 추적하고 나선다. 그리고 해맑은 표정을 지닌 문구점 주인 효이(류덕환)가 두 사람 앞에 등장한다.
표면적인 설정과 달리, 세 사람은 모두 쉽게 밝힐 수 없는 과거를 지녔다. 경주는 빚쟁이의 독촉을 못 이긴 아버지가 지른 불에 부모를 함께 잃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재신도 천애고아의 콤플렉스와 결코 잊을 수 없는 죄의식의 기억에 갇혀 있다. 효이는 어린 시절의 충격으로 인격이 붕괴된 불행한 영혼이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모두 서로에게 “고백할 것”이 있다. 영화는 스릴러 특유의 거친 호흡으로, 그 고백의 실체에 다가선다.
영화는 살인범의 실체를 영화 초반부에 공개하는 ‘과격한’ 방식을 채택한다. 여기서부터 일반적인 스릴러의 범주를 벗어난다. 살인범의 존재를 추리하는 즐거움 대신, 세 사람의 관계를 하나씩 재구성해가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퍼즐이 완성될 때쯤, 관객은 표면과 이면이 함께 존재하는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목도하게 된다. 사랑과 증오, 갈급과 혐오를 가르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영화는 핏빛으로 물들며 마무리된다.
싸이코패스와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로 인간의 관계와 정서의 본질에 다가서려 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독창적이고 매력적이다. 다만, 그것이 ‘손에 땀을 쥐고 싶어’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18세 관람가.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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